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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김수호-동아행복시/나민애♧시깃든삶-15 430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그냥 둔다 - 이성선(1941∼2001) [동아/ 2022-11-26]

그냥 둔다 - 이성선(1941∼2001) 마당의 잡초도 그냥 둔다. 잡초 위에 누운 벌레도 그냥 둔다. 벌레 위에 겹으로 누운 산 능선도 그냥 둔다. 거기 잠시 머물러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내 눈길도 그냥 둔다. 선생이라는 직업이 점차 사라져 간다고 한다. 아이들은 줄어들고 인터넷과 녹화방송이 있으니까 이제 선생은 많이 필요 없을 거라고들 한다. 그 말을 들은 선생은 좀 서글프다. 너희는 멸종될 거야, 이런 말을 듣는 심정이다. 선생에게 학생은 매우 소중한데 학생에게 선생은 그만큼 소중하지 않다. 학생들은 하나의 수업만 열심히 들을 수도 없는 처지다. 그들은 선생보다 바쁘고, 막막하고, 피곤하다. 우리 반에서 가장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발표하던 한 학생은 아파서 결석을 하더니 오늘은 누렇게 뜬 얼굴..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지붕 위의 바위 - 손택수(1970∼ ) [동아/ 2022-11-19]

지붕 위의 바위 - 손택수(1970∼ ) 바위를 품에 안고 지붕을 오르는 사람이 있다 해풍에 보채는 슬레이트 지붕을 묵직히 눌러놓으려는 것이다 나도 여울을 건너는 아비의 등에 업혀 있던 바위였다 세상을 버리고 싶을 때마다 당신은 나를 업어보곤 하였단다 노을이 질 무렵이면 혼자서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때 나는 새였다 새를 쫓는 고양이였다 지붕을 징검돌 짚듯 뛰어 항구를 돌아다니던 날도 있었다 수평선 너머 물고기들도 들썩이는 지붕 날아가지 않게 바다 위에 꾹 눌러놓은 섬들, 언젠가 나는 그 섬들을 짚고 바다를 훌쩍 건너가고 싶었는데 지붕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내가 아직 내려오질 않는다 돌아오지 않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인생은 돌발 상황을 두려워하지만 시는 의외성을 사랑한다. 예상과 다르다고 해서 다 좋다..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죽은 엄마가 아이에게 - 진은영(1970∼ ) [동아/ 2022-11-12]

죽은 엄마가 아이에게 - 진은영(1970∼ ) 진흙 반죽처럼 부드러워지고 싶다 무엇이든 되고 싶다 흰 항아리가 되어 작은 꽃들과 함께 네 책상 위에 놓이고 싶다 네 어린 시절의 큰 글씨를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알맞게 줄어드는 글씨를 보고 싶다 토끼의 두 귀처럼 때때로 부드럽게 접힐 줄 아는 네 마음을 보고 싶다 베여 나간 나무 밑동의 향기에 인사하듯 길게 구부러지는 너의 훌쩍 자란 등뼈를 만져보고 싶다 (하략) 2022년을 진은영의 새 시집이 나온 해라고 기억하고 싶었다. 시집 제목은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이고 이건 무려 10년 만의 신간이다. 거기 실린 서른아홉째 작품을 여기 소개한다. 마흔두 개의 작품 중에서 단 한 편만, 그것도 일부만 수록해서 시인을 사랑하는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딛고 - 유병록(1982∼) [동아/ 2022-11-05]

딛고 - 유병록(1982∼) 선한 이여 나에게 바닥을 딛고 일어서라 말하지 마세요 어떻게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 네가 활보하다가 잠들던 땅을, 나를 기다리던 땅을 두 팔에 힘을 잔뜩 주고서 구부러진 무릎을 펼쳐서 어떻게 너를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 여기는 이미 깊은 수렁인데 선한 이여 손 내밀어 나를 부축하지 마세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여기에 너의 웃음과 울음을 두고서 나를 부르던 목소리와 너의 온기를 두고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모두 묻어두고서 떠날 수 있을까 여기는 이미 나에게도 무덤인데 16세기의 허난설헌은 두 아이를 잃고 나서 ‘곡자(哭子)’라는 시를 썼다. 어린 자식을 잃은 심정이 어찌나 서럽던지 시인은 피눈물로 울음소리 삼킨다고 표현했다. 그 후로부터 몇백 년이 지났다. 지금은 허난설헌..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눈 - 이정록(1964∼) [동아/ 2022-10-29]

눈 - 이정록(1964∼) 맷돌구멍 속 삶은 콩들이 쭈뼛쭈뼛 자리를 바꾸는 까닭은 너 먼저 들어가라 등을 떠미는 게 아니다 온 힘으로 몸을 굴려 눈 뜨고도 볼 수 없는 싹눈을 그 짓무른 눈망울을 서로 가려주려는 것이다 눈꺼풀이 없으니까 삶은 눈이 전부니까 1930년대에 시인 백석은 잡지에서 “입을 다물고 생각하고 노하고 슬퍼하라”라고 권유한 적이 있다. 분노를 권한다니 조금 이상스러워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다들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들은 조선의 상황에 대해 분노해야 옳았다. 다시 말해 절대 다수가 단 하나의 위대한 분노를 품었다는 말이다. 오늘날 하나의 분노는 없다. 위대한 분노는 갈래갈래 쪼개졌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저마다 작은 분노의 주인이 되었다. 이제 분노는 때만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 내..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육탁 - 배한봉(1962∼ ) [동아/ 2022-10-22]

육탁 - 배한봉(1962∼ ) 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 같다 더 이상 칠 것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육탁을 치는 힘으로는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바닥 치면서 알았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초극한 직업 - 김춘추(1944∼ ) [동아/ 2022-10-15]

초극한 직업 -김춘추(1944∼ ) 삼짇날부터 쭉, 초가 제비집 옆에 새끼를 밴 어미거미 베틀에 앉았다 북도 씨줄도 없이 한국인에게 제비는 낯설지 않다. 제비를 본 적도 없는 어린애들도 이 새를 안다. 심지어 좋아한다. 이게 다 ‘흥부와 놀부’ 때문이다. 이야기 속의 제비는 은혜와 원한이 확실할 정도로 똑똑하고 사람을 부자로 만들 정도로 능력이 있다. 이야기 바깥의 이미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통적으로 제비는 삼짇날에 찾아와 중양절에 떠난다고 해서 영험한 새라고들 말한다. 이 시 맨 앞에는 떡하니 ‘삼짇날’이라는 단어가 놓여 있다. 이 강력한 단어는 제비가 돌아오는 날을 연상하게 만드니까 우리는 주인공이 제비인가 잠시 헷갈린다. 그런데 주인공은 따로 있다. 제비집 옆에 사는 거미가 바로 시의 진짜 주인..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가을 기러기 - 이희숙(1943∼) [동아/ 2022-10-08]

가을 기러기 - 이희숙(1943∼) 흰 서리 이마에 차다 무릎 덮는 낙엽길 구름 비낀 새벽달만 높아라 가을 별빛 받아 책을 읽는다 단풍잎 하나 빈 숲에 기러기로 난다 열일곱 번째 절기, 한로(寒露)가 찾아왔다. 이 바쁜 세상에서 누가 절기를 기억할까. 한로는 분명히 존재하면서도 점점 잊혀지고 있는 이름이다. 세상에 그런 단어가 한로뿐만이 아니다. 내가 잊어가는 이름이 숱하게 많고, 내 이름도 잊혀지는 숱한 이름 중 하나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한로’라는, 쓸쓸하고도 맑으며 고고한 단어를 쉽게 지나칠 수 없다. 한로에 딱 맞춰 읽기에는 오늘의 시가 제격이다. 이 시의 부제가 바로 한로이다. 여기에는 새벽녘에 깨어 있는 한 사람이 나온다. 새벽은 ‘차가운 이슬’이라는 뜻의 한로에 어울리는 시간대다. 춥고 맑..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최저의 시 - 최지인(1990∼ ) [동아/ 2022-10-01]

최저의 시 - 최지인(1990∼ ) 인간의 공포가 세계를 떠돌고 있다 알 수 있는 사실 비슷한 모양의 빌딩이 줄지어 서 있다 비슷한 모양의 아파트 단지 비슷한 모양의 마음 성내고 있다 사소한 것들 두 손 가득 쓰레기봉투 계단 내려가다 우수수 쏟아지는 냄새나는 것들 주저앉아 도망쳐버릴까 생각했었다. … 문 앞에 놓인 허물 끝없이 허물 시집의 네 페이지에 걸쳐 있는 긴 시를, 이렇게 조금만 소개하게 된 점을 독자와 시인에게 사과드린다. 이 작품에는 시대를 한창 걸어 나가야 하는 자의 불안이 가득 담겨 있는데 전체를 읽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전문을 다 읽어도 타인의 심정을 모두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를 9월의 마지막 작품으로 선택한 이유는 우리의 시절이 수상하기 때..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낙산사 가는 길·3 - 유경환(1936∼2007) [동아/ 2022-09-24]

낙산사 가는 길·3 - 유경환(1936∼2007) 세상에 큰 저울 있어 저 못에 담긴 고요 달 수 있을까 산 하나 담긴 무게 달 수 있을까 달 수 있는 하늘 저울 마음일 뿐. 가을 하늘이 높아지면 갑자기 세상이 확 넓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착시라도 좋다. 눈앞의 공간이 넓어지면 우리의 생각은 그만큼 더 자라나고 싶다. 사색하기 좋은 계절이 우리를 부추기고 있다. 혼자서, 아무도 모르게,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고 너 자신에게만 집중하라고. 단 5분이라도 고요히 앉아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다. 나는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가. 이런 질문을 쥐고 앉아 있으면 어지러운 마음 호수가 잔잔해질 것만 같다. 그럼 우리의 마음은 가을 하늘을 본받아 더 청명해지고 높아지리라. 오늘은 우리의 가을 사색을 도와줄 시를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