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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김수호-조선가슴시/최영미♣어떤 시 152

[최영미의 어떤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 김영랑(1903~1950) [조선/ 2023-02-20]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 김영랑(1903~1950)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현대 표준어에 맞춰 수정함) 봄이 저만치 와 있다. 우리말로 쓰인 봄 노래 중에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처럼 보드라운 시가 또 있을까. ‘북에는 소월, 남에는 영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김영랑은 순수한 우리말을 살려 시를 짓는 데 뛰어난 시인이었다. ‘살포시’ ‘보드레한’을 음미하노라면 마음이 밝아진다. 두 연의 1행과 2행이 ‘같이’로 끝나고 4행과 8행에 ‘-고 싶다’가 반복된 짜임새. 도드라지는 외래어 ..

[최영미의 어떤 시] [107] 이단(李端)과의 이별 -노윤(盧綸·739~799년) [조선/ 2023-02-13]

이단(李端)과의 이별 - 노윤(盧綸·739~799년) 고향 땅 여기저기 시든 풀잎이 뒤덮을 때 친구와의 헤어짐은 더없이 쓸쓸하였네 떠나는 길은 차가운 구름 너머로 이어지고 돌아올 땐 하필 저녁 눈이 흩날렸었지 어려서 부모 잃고 타향을 떠도는 신세 난리 통 겪는 중 우리 알게 됨이 너무 늦었네. 돌아보니 친구는 없고 애써 눈물을 감추니 이 풍진 세상 다시 만날 날은 언제일까 ※류인 옮김, 원시 번역시와 다르게 행을 배치함. 난리 통에 알게 된 친구는 얼마나 애틋할까. 이단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노윤의 시에 등장하는 난리는 중국 당나라를 뒤흔든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의 반란(755~763년)을 뜻한다. 당대의 시인 두보(杜甫)나 노윤의 시를 보면 약 9년 동안 지속된 전란의 흔적이 여실히 나타나있다. 태평성..

[최영미의 어떤 시] 맴돌다 - 천양희 (1942~ ) [조선/ 2023-02-06]

맴돌다 - 천양희 (1942~ ) 피그미 카멜레온은 죽을 때까지 평생 색깔을 바꾸려고 1제곱미터 안을 맴돌고 사하라 사막개미는 죽을 때까지 평생 먹이를 찾으려고 집에서 2백 미터 안을 맴돈다 나는 죽을 때까지 평생 시를 찾으려고 몇 세제곱미터 안을 맴돌아야 하나 삶의 허무니 어쩌니 길게 말해 무엇하리. “너는 평생 몇 세제곱미터 안을 맴돌았니?”라고 물어보면 게임이 끝난다. 네가 아무리 잘난 척해도, 네 아무리 별볼일 없는 사람이라도 우리는 모두 맴돌다 가는 인생. 직업에 매인 사람이라면, 직장에 구속되지 않은 사람이라도 누구나 공감할 멋진 시. 피그미 카멜레온, 사하라 사막개미 그리고 인간. 서로 다른 동물들이 색깔과 먹이와 시를 찾아 각각 1제곱미터, 2백 미터, 몇 세제곱미터 안을 맴돌다 사라진다...

[최영미의 어떤 시] 따뜻하게 - 루제비치(Tadeusz Rὀzewicz·1921~2014) [조선/ 2023-01-30]

따뜻하게 - 루제비치(Tadeusz Rὀzewicz·1921~2014) 꽁꽁 언 손은 얼마든지 녹일 수 있다 따뜻한 커피가 들어 있는 주전자만 있어도 하지만 세상은 이미 꽁꽁 얼어붙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하다 갓 태어난 아기들을 바라볼 때조차도 잠에서 깨나는 순간 그들은 녹슨 쇳소리로 덜그럭대면서, 비아냥거린다. (최성은 옮김) 설 연휴가 끝나고 북극 한파가 몰려와 따뜻한 온기가 그리운 때, 썰렁한 시를 읽었다. 세상은 따뜻하고 살 만하다는 말도 좋지만, 루제비치의 시처럼 싸늘한 사람들의 시선을 꼬집는 시도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지 않나. 명절 연휴가 모두에게 즐거운 것은 아니다. 오랜만에 얼굴을 맞대고 싸우는 가족도 적지 않았으리. 일산의 아파트에 살 때였다. 밤에 자려고 ..

[최영미의 어떤 시] 곡시(哭詩): 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 - 문정희(1947년~) [조선/ 2023-01-16]

곡시(哭詩): 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 - 문정희(1947년~) 한 여자를 죽이는 일은 간단했다. 유학 중 도쿄에서 고국의 선배를 만나 데이트 중에 짐승으로 돌변한 남자가 강제로 성폭행을 한 그날 이후 여자의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출생부터 더러운 피를 가진 여자!(…) 뭇 남자들이 다투어 그녀를 냉소하고(…) 식민지 문단의 남류들은 죄의식 없이 한 여성을 능멸하고 따돌렸다(…) 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 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다(…) (원시와 다르게 행을 배열함) 무거운 내용을 담았으나 활달하고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김명순의 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문단에서 유폐되기 전에 그이의 천성은 활달하고 밝았다. 김명순을 기리는 ‘곡시哭詩’를 쓴 문정희 선생도 활달하고 재기발랄하며 여성 문제에 대해 자..

[최영미의 어떤 시] 허망에 관하여 - 김남조(1927~ ) [조선/ 2023-01-09]

허망에 관하여 - 김남조(1927~ )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어느 방 어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도 하는 이런 일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원시와 다르게 행을 배열함) 에스프레소 커피처럼 진하고 열정적인 시어들. “내 마음을 열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는 첫 행을 읽고 나는 무장해제되었다. 어느 날 그가 왔다. 그에게 내 마음을 다 보여줄 수는 없다. 살아온 날이 얼마인데, 하나씩 차례로 열어야지. 이 서랍에는 유년의 뭉게구름, 저 서랍에는 청춘의 분홍 장미… 깊이 숨겨둔 금고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

[최영미의 어떤 시] 겨울 길을 간다 - 이해인(1945~) [조선/ 2023-01-02]

겨울 길을 간다 - 이해인(1945~) 겨울 길을 간다 봄 여름 데리고 호화롭던 숲 가을과 함께 서서히 옷을 벗으면 텅 빈 해질녘에 겨울이 오는 소리 문득 창을 열면 흰 눈 덮인 오솔길 어둠은 더욱 깊고 아는 이 하나 없다 별 없는 겨울 숲을 혼자서 가니 먼 길에 목마른 가난의 행복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겨울 숲길을 간다 새해를 맞이하며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을 읽었다. 성직 수녀라는 특수한 신분, 수녀원이라는 특별한 환경에서 잉태된 시들이기에 그의 시를 읽기 전에 어떤 선입견이 있었다. 간절하고 소박한 시구들을 찬찬히 음미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별다른 수식 없이 “겨울 길을 간다”로 시작되어 “봄 여름 데리고 호화롭던 숲”에 이르러 잠깐 쉬고 싶었다. 계절의 변화를 이토록 간단히 절묘하게 표현하다..

[최영미의 어떤 시] 살아 남은 자의 슬픔 [조선/ 2022-12-26]

살아 남은 자의 슬픔 (Ich, der Überlebende)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1898~1956) (김광규 옮김) (원시와 다르게 행을 배열함) 수식어가 거의 없지만 그래서 더 선명한 슬픔이 포탄처럼 터지는 시. (운이 좋지 않아, 혹은 충분히 강하지 못해)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한 베냐민 등 전쟁 통에 죽은 친구들에 대한 죄의식이 간결한 시어에 담겨있다. 미국으로 망명한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1944년에 독일어로 쓴 이 시의 원래 제목은 “Ich, d..

[최영미의 어떤 시] 조그만 사랑 노래 - 황동규(1938~) [조선/ 2022-12-19]

조그만 사랑 노래 - 황동규(1938~ )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어제를 동여맨 편지’라니 참 멋진 표현이다. 길이 사라지면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기 마련이나, 뒤가 반복되며 서로를 부정하는 행이 시적 긴장감을 높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다. 공기놀이를 하도 해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였는데, 내가 갖고 놀던 돌은 다 어디로 갔을까. 7행까지 언어의 밀도가 높다가 8행..

[최영미의 어떤 시] 밤눈 - 김광규(1941~) [조선/ 2022-12-12]

밤눈 - 김광규(1941~) 겨울밤 노천 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온갖 부끄러움 감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되고 싶었다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 사랑이란 서로의 바깥이 되는 것. 편안하게 읽히나 깊은 여운을 남기는 시. 복잡한 비유나 상징이 없어도 이렇게나 감동적이고 좋은 시를 만들 수 있다. 겨울 여행을 며칠 앞두고 ‘밤눈’을 읽었다. 겨울밤 노천 역이 얼마나 춥고 을씨년스러운지, 밤늦게 서울역에 내려본 사람은 알리라. 저 멀리 보이는 따스한 방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발을 동동 구르고 전동차에 올라타 기어이 내 방에 도착했을 때, 칼바람을 막을 집이 있다는 행운에 나는 감사했다. 이 시가 수록된 김광규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