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시(哭詩): 탄실 김명순을 위한 진혼가 - 문정희(1947년~)
한 여자를 죽이는 일은 간단했다.
유학 중 도쿄에서 고국의 선배를 만나
데이트 중에 짐승으로 돌변한 남자가
강제로 성폭행을 한 그날 이후
여자의 모든 것은 끝이 났다.
출생부터 더러운 피를 가진 여자!(…)
뭇 남자들이 다투어 그녀를 냉소하고(…)
식민지 문단의 남류들은 죄의식 없이
한 여성을 능멸하고 따돌렸다(…)
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
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다(…)
(원시와 다르게 행을 배열함)
무거운 내용을 담았으나 활달하고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김명순의 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문단에서 유폐되기 전에 그이의 천성은 활달하고 밝았다. 김명순을 기리는 ‘곡시哭詩’를 쓴 문정희 선생도 활달하고 재기발랄하며 여성 문제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 내기를 주저하지 않는 분이다.
당대 문단 권력들이 나서서 핍박해 결국 못 버티고 조선 땅을 떠나 일본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은 한국 여성 최초의 소설가, 처음 시집을 낸 여성 시인은 탕녀라는 낙인이 찍혀 내팽개쳐졌다. 김명순을 음해한 남성 문인들을 싸잡아 ‘식민지 문단의 남류(男流)’라고 일갈한 표현이 멋지다. 아직도 내 이름 앞에 ‘여류 시인’을 붙이는 몰지각한 남성들에게 ‘곡시’를 읽히고 싶다. ‘여자라는 식민지’가 가슴을 찌른다. 여자처럼 글로벌하고 오래된 식민지가 있던가.[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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