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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김수호-문화새나시/유희경♣시 : 선

[유희경의 시:선] 시인으로 사는 일 - 유계영 [문화/ 2021-07-28]

설지선 2021. 8. 13. 20:35

[유희경의 시:선] 시인으로 사는 일 - 유계영 [문화/ 2021-07-28]





시인으로 사는 일 - 유계영

자동판매기가 되지 않을 것. 한 사람이 다가와 지폐를 몇 장 넣고 레버를 돌린다 해도 원하는 말을 들려주지 않을 것. 한푼 두푼 모은 돈이라는 것에 개의치 않을 것.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한 사람이 온 힘을 다해 발로 걷어찬다면? 찌그러진 캔 하나 흘려줄 것.

 

- 유계영, ‘시’(시집 ‘지금부터는 나의 입장’)



시인으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 대중 강연을 마치고 시집을 들고 온 사람들에게 서명을 해주다가 받은 난데없는 질문에 잠시 말을 잊었다.

글쎄요 하고 눙치려다가 호기심 가득한 눈을 보고 말았다. 그래서 좋지만은 않아요 말하고 웃었다. 사실 별다른 기대가 없었던 모양이다. 나를 따라 하하 웃은 그는, 시집을 챙겨 돌아섰다.

시는 아름다운 말의 모음이며, 시인은 그런 언어를 좇는 이들이라 여긴다. 분명 그런 때도 있었으리라.

이제 더는 그럴 수 없다. 시인의 역할은 성가신 등에가 되는 것이다. 모두가 외면하는 사실을 드러내는 일, 덮어두고 괜찮다는 위로를 경계하는 일이 시인의 일이다. 그런 소임이 어찌 좋을 수 있을까. 듣고 싶은 말을 해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듣기 싫은 말에 더 나은 삶으로 가는 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비단 시인만이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건넬 필요만큼이나 듣기 싫은 말, 듣기 아픈 말도 필요하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말도 들을 줄 아는 능력이다. 듣기 싫은, 골치 아픈 얘기를 누가 좋아하겠나. 그래서 시인으로 사는 일이 좋지만은 않다. [유희경 시인·시집서점 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