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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김수호-동아행복시/나민애♧시깃든삶-15 430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빛멍 ― 이혜미(1988∼) [동아/ 2022-02-12]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빛멍 ― 이혜미(1988∼) [동아/ 2022-02-12] 빛멍 ― 이혜미(1988∼) 돌이켜보아도 무례한 빛이었다. 최선을 다해 빛에 얻어맞고 비틀거리며 돌아오는 길이었다. 응고되지 않는 말들, 왜 찬란한 자리마다 구석들이 생겨나는가. 너무 깊은 고백은 테두리가 불안한 웅덩이를 남기고. 넘치는 빛들이 누르고 가는 진한 발자국들을 따라. 황홀하게 굴절하는 눈길의 영토를 따라. 지나치게 아름다운 일들을 공들여 겪으니 홀로 돋은 흑점의 시간이 길구나. 환한 것에도 상처 입는다. 빛날수록 깊숙이 찔릴 수 있다. 작은 반짝임에도 멍들어 무수한 윤곽과 반점을 얻을 때, 무심코 들이닥친 휘황한 자리였다. 눈을 감아도 푸르게 떠오르는 잔영 속이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책 ‘미의 역사’에 따르..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바다 3 ― 정지용(1902∼1950) [동아/ 2022-02-05]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바다 3 ― 정지용(1902∼1950) [동아/ 2022-02-05] 바다 3 ― 정지용(1902∼1950) 외로운 마음이 한종일 두고 바다를 불러― 바다 우로 밤이 걸어온다. ‘논어’를 보면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는 말이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등산하시는 분들이 특히 이 구절을 좋아한다. 역시 지자보다는 인자가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우열이 무슨 상관이랴. 바다와 산은 서로 대결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인생에 바다와 산이 차례대로 왔다 가기도 한다. 시인 정지용이 그랬다. 정지용 시인은 젊어서 바다의 시를 여러 편 썼고 조금 더 나이 들어서는 산의 시를 썼다. 바다의 시는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그림자 ― 함민복(1962∼) [동아/ 2022-01-29]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그림자 ― 함민복(1962∼) [동아/ 2022-01-29] 그림자 ― 함민복(1962∼) 금방 시드는 꽃 그림자만이라도 색깔 있었으면 좋겠다 어머니 허리 휜 그림자 우두둑 펼쳐졌으면 좋겠다 찬 육교에 엎드린 걸인의 그림자 따듯했으면 좋겠다 마음엔 평평한 세상이 와 그림자 없었으면 좋겠다 그림자는 없는 듯 있다. 무채색인 주제에 늘 무겁게 처져 있는 것. 많은 사람들이 무심하게 밟고 지나가도 아야 소리 못하는 것. 그저 질질 끌려다니다 사람이 죽으면 함께 사라지는 것이 그림자의 운명이다. 쓸모없는 그림자라도 시인들만은 제법 좋아하고 중시했다. 가까이로는 김소월이 영혼을 일러 그림자 같은 것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중국의 이백은 ‘월하독작’에서 말하길 달과 나와 그림자 셋이 모여..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한솥밥 ― 문성해(1963∼) [동아/ 2022-01-22]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한솥밥 ― 문성해(1963∼) [동아/ 2022-01-22] 한솥밥 ― 문성해(1963∼) 기껏 싸준 도시락을 남편은 가끔씩 산에다 놓아준다 산새들이 와서 먹고 너구리가 와서 먹는다는 도시락 애써 싸준 것을 아깝게 왜 버리냐 핀잔을 주다가 내가 차려준 밥상을 손톱만 한 위장 속에 그득 담고 하늘을 나는 새들을 생각한다 내가 몇 시간이고 불리고 익혀서 해준 밥이 근육이 되고 새끼들 적실 너구리 젖이 된다는 생각이 밥물처럼 번지는 이 밤 은하수 물결이 잔잔히 고이는 어둠 아래 둥그런 등 맞대고 나누는 한솥밥이 다디달다 추위라고 해서 다 같은 추위는 아니다. 배가 고프면 더 춥다. 학교도 유튜브도 이 명징한 진실을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이건 배가 고파서 더 추웠던 사람이 알려주거나,..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저녁이면 돌들이 ― 박미란(1964∼) [동아/ 2022-01-15]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저녁이면 돌들이 ― 박미란(1964∼) [동아/ 2022-01-15] 저녁이면 돌들이 ― 박미란(1964∼) 저녁이면 돌들이 서로를 품고 잤다 저만큼 굴러 나가면 그림자가 그림자를 이어주었다 떨어져 있어도 떨어진 게 아니었다 간혹, 조그맣게 슬픔을 밀고 나온 어린 돌의 이마가 펄펄 끓었다 잘 마르지 않는 눈빛과 탱자나무 소식은 묻지 않기로 했다 “저녁이면 돌들이 서로를 품고 잤다.” 첫 구절만으로도 이 시에 대해서는 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진정한 맛집에는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은 법이다. 저녁에 서로를 품고 자는 돌들이라니. 이 말을 들은 순간 우리는 그것들을 본 적도 없으면서 이미 본 듯도 하다. 사실 우리는 저 돌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궁금하면 어..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매화 ― 한광구(1944∼) [동아/ 2022-01-08]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매화 ― 한광구(1944∼) [동아/ 2022-01-08] 매화 ― 한광구(1944∼) 창가에 놓아둔 분재에서 오늘 비로소 벙그는 꽃 한 송이 뭐라고 하시는지 다만 그윽한 향기를 사방으로 여네 이쪽 길인가요? 아직 추운 하늘문을 열면 햇살이 찬바람에 떨며 앞서가고 어디쯤에 당신은 중얼거리시나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 하나가 매화꽃으로 피었네요. 매화꽃으로 피었네요. 이쪽 길이 맞나요? 좋은 것 중에서도 드문 것에 대하여 우리는 ‘귀하다’고 표현한다. 매화도 그중의 하나다. 봄날의 꽃은 많아도 혹한을 이기고 피는 꽃은 드물다. 옛 선인들은 백매화를 보면 깨끗하다 칭송했고 홍매화는 보면 신비롭다고 사랑했다. 그들에게 매화는 결코 물체가 아니었다. 그 속에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새 달력 첫날 ― 김남조(1927∼) [동아/ 2022-01-01]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새 달력 첫날 ― 김남조(1927∼) [동아/ 2022-01-01] 새 달력 첫날 ― 김남조(1927∼) 깨끗하구나 얼려서 소독하는 겨울 산천 너무 크고 추웠던 어릴 적 예배당 같은 세상에 새 달력 첫날 오직 숙연하다 천지간 눈물나는 추위의 겨울 음악 울리느니 얼음물에 몸 담그어 일하는 겨울 나룻배와 수정 화살을 거슬러 오르는 겨울 등반대의 노래이리라 추운 날씨 모든 날에 추운 날씨 한평생에도 꿈꾸며 길가는 사람 나는 되고 지노니 불빛 있는 인가와 그곳에서 만날 친구들을 꿈꾸며 걷는 이 나는 되고 지노니 새 달력 첫날 이것 아니고는 살아내지 못할 사랑과 인내, 먼 소망의 서원을 시린 두 손으로 이 날에 바친다 온라인 게임을 하다 보면 여러 번 죽게 된다. 죽어야 경험치도 쌓이고..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눈 내린 아침 - 한경옥(1956∼) [동아/ 2021-12-25]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눈 내린 아침 - 한경옥(1956∼) [동아/ 2021-12-25] 눈 내린 아침 - 한경옥(1956∼) 설핏 치맛자락 스치는 소리 댓가지 풀썩거리는 소리 문풍지 흔들리는 소리 들은 듯한 밤 어머니 살그머니 다녀가셨나 보다. 장독대 위에 백설기 시루 놓여있는 걸 보니 착한 일을 하지 않으면 산타의 선물을 받지 못한다. “나는 선물을 받을까요?” 하루에도 열두 번 어린 아들이 물어올 때면 행복하며 씁쓸하다. 아들은 착한 일을 안 해도 선물을 받을 테니까 행복하다. 그리고 예전에 착한 어린이였던 모든 착한 어른들은 선물을 못 받을 테니까 씁쓸하다. 적어도 성탄절에는 조금만 더 따뜻하고 싶다. 그래서 선물을 준비했다. 성탄절에 기다리는 산타의 선물 부럽지 않은 시, ‘눈 내린 아침’..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한마음 의원 ― 손미(1982∼)[동아/ 2021-12-18]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한마음 의원 ― 손미(1982∼) [동아/ 2021-12-18] 한마음 의원 ― 손미(1982∼) 흰 달이 돌던 밤 의원에 누워 있는 너의 머리에 수건을 얹어 주었다 거기에 내가 들어 있지 않았다 밖에서 아이들이 공을 찼고 너는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방금 멸종된 종족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안 사랑하는데 여기 있어도 될까 머리와 머리가 부딪혀 깨지는데 흰 달이 도는데 네가 누워 있는 여기로 아무도 오지 않았다 수건을 다른 방향으로 접어 너의 머리에 얹어 주었다 병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슬펐다 분명 내 돈 주고 샀는데 받은 선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손미 시인의 시집이 딱 그랬다. 제목은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민음사, 2019년).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그 꿈 다 잊으려고 - 정양(1942년∼) [동아/ 2021-12-11]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그 꿈 다 잊으려고 - 정양(1942년∼) [동아/ 2021-12-11] 그 꿈 다 잊으려고 - 정양(1942년∼) 밤마다 꿈을 꾸어도 아침마다 대개는 잊어버리고 어쩌다 한 토막씩 말도 안 되게 남아 있다 나는 한평생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나 잊어도 좋은 꿈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고, 꿈꾸며 살 날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나는 한평생 얼마나 많은 꿈을 잊었나 사는 게 잊어버리는 연습이라면 말도 안 되게 남은 꿈들은 언제 다 잊을 것인가 그 꿈 다 잊으려고 아침마다 잠이 모자라나보다 아침마다 말도 안 되는 몇 토막 그리움으로 모자란 채로 나는 남는다 박태원의 소설 중에 ‘적멸’이라는 작품이 있다. 1930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소설인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인생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