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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김수호-문화새나시/유희경♣시 : 선

[유희경의 시:선] 귤 상자 - 안희연 [문화/ 2021-12-22]

설지선 2021. 12. 22. 19:10

[유희경의 시:선] 귤 상자 - 안희연 [문화/ 2021-12-22]




귤 상자 - 안희연

귤 상자를 들고 너의 집을 찾아가는 길이었어. 겨울 금화는 귤. 겨울 금화는 귤. 노래진 손을 보며 낄낄거릴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이상하지, 골목은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좀처럼 길을 내어주지 않고. 너의 집을 찾을 수가 없어. 너의 집을 찾아갈 수가 없구나.


- 안희연 ‘단차’(시집 ‘사랑에 대답하는 시’)


서점, 하면 책을 떠올리는 게 보통의 경우겠다. 하물며 서점지기라면 응당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먹을 것’을 생각한다.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먹을 것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 좋은 친구가 많은 덕분이다. 그들은 빈손으로 오지 않는다. 늘 양손 가득 무언가 챙겨오고 그것은 대부분 먹을 것들이다. 우리 서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식탐이 별로 없어서 남기 일쑤다. 나는 가끔 동료들에게 서점을 하면 배를 곯는다 생각하는 걸까, 하고 농을 던지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겨울 서점엔 귤 상자가 있다. 제주에 사는 친구가 하나, 제주에 놀러 간 친구가 하나, 제주의 친척이 귤 농사를 하는 독자가 하나. 과장을 보태 귤 상자 탑이 만들어진다. 귤은 늘 반갑다. 나누어 먹기 편한 데다가, 싫어한다는 이를 만나본 적이 없으니까. 귤이 오면 바구니에 담아 서점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준다. 다들 부담 없이 받아간다. 금화를 나누어주는 사람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친구들 마음을 알겠어. 나누는 일은 대단해.

받기만 할 수 없으니 올겨울엔, 친구들 집에도 한 상자씩 보내야겠다 생각했다. 뭐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서늘해진 귤을 손끝 노랗게 될 때까지 까먹다 보면 춥고 깜깜한 겨울밤이 금방 말랑말랑해지니까. 그런 겨울밤을 선물해보고 싶었다. 잊고 미루고 하다가 결국 때를 놓쳤다. 내가 하는 게 그렇지 뭐. 혀를 찼다. 마음이 부족한 거야. 자책을 하면서 내년을 기약해본다. 작년에도 그랬는데 말이지. [유희경 시인·서점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