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휘경의 시:선] 놓치는 일 - 강기원 [문화/ 2021-12-08]
놓치는 일
불화다
나와 손
손과 사물의
잡았던 것을, 그리 여긴 것을 자꾸 놓친다
물컵, 약병, 펜, 식칼, 약속, 초심, 다짐…… 그리고 당신
미끄러져
깨지고, 불가해지고, 뒤틀리고, 더럽혀지고, 핏줄을 끊고……
더러는 아예 사라진다
지문이 점점 무늬를 잃어 가는 동안,
- 강기원 ‘스르륵’(시집 ‘다만 보라를 듣다’)
내겐 오래된 징크스가 하나 있다. 큰일을 하나 끝내고 나면 무엇이든 망가뜨리거나 잃어버리는 것이다. 딴 데 정신이 팔려서겠지,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거나. 하여간 그런 일은 ‘기어코’ 벌어지고 만다. 불쾌함도 익숙해지는 모양이다. 나는 고작 그럴 줄 알았다고 중얼거리며 쉽게 체념한다. 어쩌겠어. 잔뜩 성질을 부려봐야 돌이킬 수 없는 일이고 그저 내 책임이다.
새 시집 출간을 목전에 두고 나는 다시 불안해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어떤 사달이 날 것인가. 지난번 시집을 펴냈을 때는 노트북을 떨어뜨려 고장 내고 말았다. 자책과 불편의 시간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잔뜩 긴장해서 주변을 챙겼으나, 신기하지.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번에는 안경이다. 매일 쓰고 다니는, 좀처럼 벗지 않는 안경을 잃어버렸다. 출근할 때는 쓰고 있었던 그것이 퇴근할 때쯤에는 없어졌다. 서점을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안경은 나타나지 않았다. 서점 동료는 어떻게 안경을 잃어버릴 수 있느냐고 핀잔을 줬다. 어딘가 다른 차원으로 가는 구멍이라도 있는 모양이야. 애써 눙쳐보았지만 태연해질 리 없었다.
새 안경을 맞추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놓치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무소유와 같은 거창한 생각까진 아니어도, 원래 내 것이란 없으니까 스르륵 놓치는 법을 배워가는 중은 아닐까. 어깨의 힘을 풀고 작별을 배우라고 삶이 가르쳐주는 것이라면 이 정도 수업료는 괜찮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스스로를 애써 위로했다. [유희경 시인·서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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