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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김수호-문화새나시/유희경♣시 : 선

[유희경의 시:선] 가능주의자 - 나희덕 [문화/ 2021-12-15]

설지선 2021. 12. 15. 17:38

[유희경의 시:선] 가능주의자 - 나희덕 [문화/ 2021-12-15]





    가능주의자 - 나희덕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합니다

    큰 빛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며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긋남에 대해
    말라가는 잉크로나마 써나가려 합니다.

    - 나희덕 ‘가능주의자’(시집 ‘가능주의자’)



책장을 청소하다가 새것에 가까운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작년 말에 구입한 것이다. 새로운 각오와 다짐을 부려놓기 위해서 오래 고민해 골랐던 기억이 난다. 어째서 난 꾸준하지 못한 것일까. 던져놓으려다가 혹시 몰라 펼쳐보았다. 중요한 기록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앞 몇 장만 빼곡하다. 드물어지다 마침내 날짜만 적힌 페이지들이 이어진다. 볼 것도 없는데 어쩐지 뭉클해지고 말았다.

그 텅 빈 여백이 내게 주어졌던 무수한 날이었던 것이다. 그저 날짜만 가지고도, 이맘때쯤엔 이런 일을 했었고, 이즈음엔 이런 일이 있었지 더듬어볼 수 있었다. 이렇게 했으면 좋았겠다. 이렇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이 모든 것이 내게 가능성이었다.

1년을 370일로 만들어낼 능력은 없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365일을 하루도 빼지 않고 고스란히 살아볼 기회가 내게 있었다. 늘 열심히 살았던 건 아니었다. 실수도 실패도 많았고 더러 게으르기도 했었다. 그렇다고 내게 주어졌던 모든 가능성이 무위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기록하지 않은, 지나가 돌이킬 수 없는 날들이 쌓여 내게 내년이, 미래가 되는 게 아니겠는가. 그 시간을 아낌없이 살아보고 싶어졌다. 가능주의자의 마음으로. 이것이 내년의 다짐. 나는 다이어리를 도로 책장에 꽂아두고 말았다. 아직 버릴 때가 아니었다. 그러면서 내년, 열심히 써볼 다이어리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궁리를 해보는 거였다. [유희경 시인·서점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