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경의 시:선] 가을 걱정 - 박지웅 [문화/ 2021-08-18]
가을 걱정 - 박지웅
그러고 보니 저것들이 다 그물이다
오리나무 서어나무 수양버들 모두 공중에 던져놓은 그물이다 빗방울과 흙을 넌지시 이겨 엮은
잔물결에서 건진 종소리마냥 부드러워 놀라는 새 하나 없는 그물이다
그 일이 대수롭지 않은 듯 그는 새를 꺼낸다 동박새 어치 황조롱이 할 것 없이 하나둘 바깥으로 날려 보낸다
- 박지웅 ‘아무도 믿지 않아 모두가 버린 이야기’(시집 ‘나비가면’)
입추가 뭐야. 묻는 아이가 있다. 이제 가을이란 뜻이야. 대답하는 엄마가 있다. 가을이 뭐야 아이가 묻는다. 잎들이 하나둘 빨개지고 노래지는 때야 엄마가 대답한다. 아이는 그게 뭐야, 하고는 깔깔댄다. 아직도 초록색인데, 나무들. 대화를 엿듣다가 번쩍 고개를 들어보니 은행나무의 무성한 잎들이 보인다. 내 눈에는 엄마 말이 맞는데. 슬쩍 노란빛이 비치고 있는데. 참견하고 싶지만, 공연한 짓이다. 아이도 알게 되겠지. 여름 다음엔 가을이 온다는 사실을. 바람 끝이 조금씩 서늘해지고 있다는 사실도. 계절의 변화 역시 경험으로 알게 되는 것이니까. 아이의 나이는 여름이다.
언뜻언뜻 빛이 새어 나오는 가지들의 그물을 보고 있자니, 무서운 것도 있다. 여름 다음 가을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괴상한 걱정이 생기는 것이다. 어디는 폭우 어디는 폭염이라고 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백 년도 되지 않아 생명이 살기 어려운 때가 온다는 말은 이제 우려가 아니라 경고가 됐다. 여름의 아이들에게 미안해지고 만다. 우리가 만끽하느라, 그들은 누릴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나하나 이름이 있는 저 나무들과 선물 같은 그늘 아래서, 가을을 기다리는 이 당연한 일을 어떻게 하면 온전히 전해줄 수 있을까. 이제는 고민할 때가 아닌 듯도 하고. [유희경 시인·서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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