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경의 시:선] 사과 한 알만 한 시간 - 손음 [문화/ 2021-09-01]
트럭 위에서 사과가 잠을 잔다 한 봉지 오천 원!을 외치던 팔리지 않는 사과가 남자를 대신해서 똥파리를 대신해서 늦가을의 오후를 곤히 잔다 모처럼 사과를 벗어난 사과는 트럭도 버리고 남자도 버리고 오로지 완벽한 잠이 되어 트럭을 잔다 - 손음, ‘사과와 트럭’(시집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 며칠 전부터 매일 사과를 깎는다. 점심을 먹고 나른해지려는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냉장고 문을 연다. 딱히 사과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사과에는 여태 별 관심이 없었다. 누가 깎아서 놓아두면 한두 개 집어먹고 그만이었다. 관심이 없으니 직접 칼을 들고 깎을 일도 없었다. 갑작스레 사과의 맛을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다. 과일 섭취에 신경 쓰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은 것도 아니다. 사과를 한 상자 선물 받은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매일 사과를 깎는다. 사과 깎기가. 사과를 깎는 시간이 좋다. 이유라면 그것뿐이다. 계기가 있었다. 아오리 한 봉지가 생긴 것이다. 냉장고 안에서 시들어가다가 버려질 것이 뻔했다. 뭐 그리 어려울 것도 없을 것 같았는데 한 알을 깎는 데 십 분도 넘게 걸렸다. 여태껏 받아먹기만 했으니 서툰 게 당연하지. 아오리를 아삭아삭 씹으면서, 그런데 이 시간 참 좋구나 했다. 불안 걱정 같은 것 다 잊고 사과 한 알에 , 그것의 껍질을 벗겨내는 데 몰두하는 전심의 시간. 나중에 알고 보니 아오리는 깎아 먹는 게 아니란다. 껍질째 먹는 게 좋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나는 사과 깎기가 좋은데. 그래서 매일매일 사과를 깎는다. 그래서 매일매일 사과를 깎는다. 익숙지 않고 서툰, 사과 한 알만 한 내 시간. 낮잠처럼 평온한 나만의 시간을 얻기 위해서. [윤흰경 시인·서점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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