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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김수호-문화새나시/유희경♣시 : 선

[유희경의 시:선] 원경 - 이혜미 [문화/ 2021-09-15]

설지선 2021. 9. 15. 17:21

[유희경의 시:선] 원경 - 이혜미 [문화/ 2021-09-15]

 

 



원경 - 이혜미



썰물 지는 파도에 발을 씻으며 먼 곳을 버리기로 했다. 사람은 빛에 물들고 색에 멍들지. 너는 닿을 수 없는 섬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미간을 좁히는구나.

 

수평선은 누군가 쓰다 펼쳐둔 일기장 같아. 빛이 닿아 뒷면의 글자들이 얼핏 비쳐보이듯, 환한 꿈을 꺼내 밤을 비추면 숨겨두었던 약속들이 흘러나와 낯선 생이 문득 겹쳐온다고.

 

멀리, 생각의 남쪽까지 더 멀리. 소중한 것을 애써 가지려 하지 않는 잠시의 영원을 믿으면서. 섬 저편에 놓아두고 온 것들에게 미뤄왔던 대답을 선물했지. 구애 받는 것에 구애받지 않기로 했다. 몰아치는 파도 속이라도 소라껍질 안에는 지키고 싶은 바다가 있으니까.

 

잃어버리고 놓쳐버린 것들을 모래와 바다 사이에 묻어두어서…… 너는 해변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하나마다 마음을 맡기는구나. 먼 곳이 언제나 외로운 장소인 건 아니야. 눈을 감았다 뜨면 희미하게 떠오르는 밤의 마중, 꿈의 배웅.

 

바래다줄게. 파도가 칠 때마다 해안의 경계선이 손을 내밀듯. 꿈을 밤 가까이 데려오기 위해 우리가 발명한 것들 중 가장 멋진게 바로 시간이니까.

 

최대한 위태롭게 새끼손가락을 걸고 바다에 가자. 무게를 잊고 팽팽한 수평선 위를 걸어봐. 멀리를 매만지던 눈 속으로 오래 기다린 풍경들이 쏟아지도록.

 

 

- 이혜미, ‘원경’(시집 ‘빛의 자격을 얻어’)



 

내 친구 M도 서점을 운영한다. 실은 서점을 운영하는 친구가 둘이나 더 있다. 그들 모두 먼저 친구였고 각각의 이유로 훗날 서점을 열었다. 나는 가끔 그런 사실이 우습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싶고 크크, 소리 내어 웃기도 한다. 아무튼, 그중 하나인 M의 서점은 바닷가에 있다. 바다 근처도 아니고 정말 바닷가 말이다.

나는 그 서점에 딱 한 번 가봤다. 재작년 늦은 겨울. M의 서점은 수평선을 가지고 있었다. 갯내를 가지고 있었다. 거세지만 못되지는 않은 바닷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서점 앞 아주 작은 정원에 앉아서 낮 바다가 저녁 바다가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집어등을 켠 배들이 검게 변한 밤하늘과 밤바다를 갈라놓았다. 감기 걸릴라. 친구의 걱정에도 나는 추운 줄 모르고 바다를 보았다. 안심을 했던 것이다. 등 뒤에는 불 밝힌 서점이 있고 앞에는 한없는 세계가 있으니 나는 작디작아서, 이런 내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이상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단 한 번, 고작 반나절 바닷가 서점은 내게 그렇게 남았다.

나는 궁지에 몰린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그 바닷가 서점을 떠올린다. “먼 곳을 버리”는 마음으로 당장의 위안을 얻기 위해서. 조금만 더 힘들어지면 나는 그곳으로 도망갈 거야. 마치 각오처럼. 그러곤 주위를 둘러보면, 위태로워 보이기만 했던 것들이 제법 넉넉한 듯 여겨지고 한숨 돌릴 수 있게 된다. 아주 멀리서 내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유희경 시인·서점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