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 화장을 하며 - 문정희 (文貞姬·1947∼) [조선/ 2021.07.19]
화장을 하며 - 문정희 (文貞姬·1947∼)
입술을 자주색으로 칠하고 나니
거울 속에 속국의 공주가 앉아 있다
내 작은 얼굴은 국제 자본의 각축장
거상들이 만든 허구의 드라마가
명실공히 그 절정을 이룬다
좁은 영토에 만국기 펄럭인다
금년 가을 유행색은 섹시브라운
샤넬이 지시하는 대로 볼연지를 칠하고
예쁜 여자의 신화 속에
스스로를 가두니
이만하면 음모는 제법 완성된 셈
가끔 소스라치며
자신 속의 노예를 깨우치지만
매혹의 인공향과 부드러운 색조가 만든
착시는 이미 저항을 잃은 지 오래다
시간을 손으로 막기 위해 육체란
이렇듯 슬픈 향을 찍어 발라야 하는 것일까
안간힘처럼 에스티 로더의 아이라이너로
검은 철책을 두르고
디오르 한 방울을 귀밑에 살짝 뿌려 마무리한 후
드디어 외출 준비를 마친 속국의 여자는
비극 배우처럼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문정희 선생님이 낭독하는 “화장을 하며”를 들은 적이 있다. 샤넬 에스티로더 디오르를 바른 얼굴을 국제자본의 각축장으로 보는 발상이 신선해 충격을 받았다. 육십이 지났는데도 시인의 감수성은 늙지도 낡지도 않았다. 프랑스의 샤넬, 미국의 에스티 로더 등 각국을 대표하는 브랜드의 색조화장품을 ‘만국기’에 비유하다니. 19행의 ‘철책’은 10행의 ‘가두니’와 호응한다. 그 세련되고 재기발랄한 언어에 나는 반했다.
젊고 예뻐 보이기 위해, 사회생활의 필요에 의해 (화장하지 않고 출근하면 어디 아프냐고 묻는 상사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화장을 포기하지 못하는 여자들. 스킨 로션에 자외선 차단제만 바르고 외출하고, 화장하는 날이 1년에 서너 번이라 색조화장품을 사면 5년 넘게 쓰는 건 기본. 화장을 포기하는 건 여성을 포기하는 거라고 믿지는 않지만, 더 늙어 내 경대에서 립스틱이 치워지는 그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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