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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김수호-조선가슴시/최영미♣어떤 시

[최영미의 어떤 시] 참고문헌 없음 - 이성미 (1967∼ ) [조선/ 2021.03.29]

설지선 2021. 3. 29. 09:24

[최영미의 어떤 시] 참고문헌 없음 - 이성미 (1967∼ ) [조선/ 2021.03.29]

 

 

     

     

    참고문헌 없음 - 이성미(1967~ )



    거리, 소리 내어 말하면 회색 길이 나타난다 (중략) 거리, 라고 다시 말하면, 사람이 서 있다.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간을 본다. 내가 원하지 않을 때 좁혀지는 거리, 나는 위협을 느끼고 거리 밖으로 달려 나간다. (중략) 지워진 입이고, 처음 생겨난 입이고, 더듬거리는 입이고, 소리치는 입이고, 지금은 독백을 중얼거리는 입이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중략) 발화 이후 저 문장은 어디로 가야 하지. 누구에게 닿는 것이지. 공기 속으로 흩어지나. 햇빛에 증발할 건가. 다시 내 몸속으로 들어와야 하나. 저 문장은 어딘가로 가서 완성되어야 한다. 그것이 저 문장을 들은 사람들이 할 일. 지금은 독백이 공허하게 울리며, 독백에 독백이 더해지는 중이다.


    (※시인의 동의를 얻어 원시와 다르게 행을 배열)

 

‘#문단_내_성폭력'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했던 이성미 시인의 묵직한 산문시. 제목인 ‘참고문헌 없음’은 지금까지 문학계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삭제해온 ‘문헌’들에 맞서 여성의 입으로 스스로의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내가 원하지 않을 때 좁혀지는 거리에서 폭력이 발생한다. 위협을 느끼고 거리 밖으로 달려 나가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다”라고 마침내 발화하기까지 긴 시간을 속도감 있게 잘 그렸다.

 

그녀의 고백을 들은 사람들이 할 일을 하지 않고 피해자를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아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서사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귀 기울여 듣는다면 어떤 독백도 공허하지 않다. 우리 사회는 #Me Too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여성들이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다음은 시 전문.

     

    참고문헌 없음 - 이성미 (1967∼)

     

    거리, 소리 내어 말하면 회색 길이 나타난다. 나는 회색 보도블록 위를 걷는다. 거리, 라고 다시 말하면, 사람이 서 있다.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간을 본다. 내가 원하지 않을 때 좁혀지는 거리, 나는 위협을 느끼고 거리 밖으로 달려 나간다.

    거리,

    사건과 사건 사이의 거리. 길고 긴 시간이었다가 공백이었다가 무덤이었다가 엉켜서 똘똘 뭉친 털실 뭉치였다가 사라지는, 남아있는, 사건과 일상 사이의 거리.

    사건과 인지 사이의 거리,

    인지와 발화 사이의 거리,

    그 거리에 대해서,

    나는 없던 입이고, 지워진 입이고, 처음 생겨난 입이고, 더듬거리는 입이고, 소리치는 입이고, 지금은 독백을 중얼거리는 입이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나는 잘못한 것이 아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다.

    발화 이후

    저 문장은 어디로 가야 하지. 누구에게 닿는 것이지. 공기 속으로 흩어지나. 햇빛에 증발할 건가. 다시 내 몸속으로 들어와야 하나.

    저 문장은 어딘가로 가서 완성되어야 한다. 그것이

    저 문장을 들은 사람들이 할 일.

    지금은 독백이 공허하게 울리며, 독백에 독백이 더해지는 중이다.

     

    (※시인의 동의를 얻어 원시와 다르게 행을 배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