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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김수호-조선가슴시/최영미♣어떤 시

[최영미의 어떤 시] 바다와 나비 - 김기림(金起林·1908~?) [조선/ 2021.03.22]

설지선 2021. 3. 22. 11:12

[최영미의 어떤 시] 바다와 나비 - 김기림(金起林·1908~?) [조선/ 2021.03.22]

 

 

    바다와 나비 - 김기림(金起林·1908~?)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나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거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나비의 허리에 걸린 “새파란 초생달”이 산수화 한 폭 같다. 선명한 이미지, 절제미가 뛰어난 작품이다. 영문학을 전공한 김기림이 일제강점기에 이처럼 우리말의 맛을 잘 살리면서도 현대적인 시를 썼다.

 

처음 읽을 때는 귀엽고 앙증맞고 서글픈 공주의 시였다. “공주처럼 지쳐서” 바다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철없이 나대다 물결에 흠뻑 젖어 돌아온 나비를 이보다 잘 표현할 수 없다.

 

푸른색에 속아 무밭인 줄 알고 바다에 내려갔다 날개가 젖었다. 날개가 젖은 나비가 다시 날 수 있을까? 다시 읽으니 심상치 않다. 그 바다는 일본 유학생이었던 김기림이 건넌 현해탄. 나비는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좌절한 식민지 지식인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여러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따뜻한 봄날 나는 이 시를 바다처럼 넓은 세계를 동경하다 가혹한 현실에 좌절한 예술가의 자화상이 아니라 그냥 바다와 나비 이야기로 읽고 싶다. 바다를 모르는 나비는 물결에 흠뻑 젖어가면서 바다를 배울 수밖에.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