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위기가 위기를 부르는 한국 [동아/ 2015-04-22]
천안함 5년, 세월호 1년에도안보와 안전은 관심 없고
오로지 권력 투쟁만
조선시대 명분론 전통 속에 ‘건강한 민주주의’는 요원해
더 큰 시련 닥쳐올 텐데…넘어설 수 있을까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
당시 신문을 찾아봤다. 사설 제목은 ‘한국의 전쟁과 평화’였다. 1951년 6월 소련의 제의로 시작된 휴전회담 등 전쟁 상황을 전하면서 6·25전쟁을 끝내려면 1945년 38선 체제로 되돌아가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유엔은 한국을 민주적이고 독립적인 국가로 만들고 싶어 하지만 한국에선 어차피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없다고 혹평한 것이다. 영국은 6·25 때 미국 다음으로 많은 5만6000명의 병력을 보낸 나라였고 더 타임스는 그때나 지금이나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신문이다. 사설에는 당시 한국에 대한 서방 세계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었다.
해당 글에는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가 비관적인지 정확히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전후 맥락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1945년 광복부터 1948년 건국 이전까지 한국 사회는 좌우 대립으로 극심한 혼란상을 보였다. 더구나 6·25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아 많은 국민들이 부산 임시수도에서 고통스러운 피란 생활을 하는데도 정치권은 대통령 직선제 도입을 놓고 권력 투쟁에 골몰했다. 외국의 눈에는 한국에서 ‘건강한 민주주의’는 가당치 않은 것으로 비쳤을 것이다.
6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한국 사회가 그때보다 얼마나 달라졌는지 살펴보면 회의적인 생각이 앞선다. 특히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확연히 드러나는 우리의 취약점은 위기가 더 큰 위기를 부른다는 사실이다. 정치 세력들이 위기 상황을 상대방 공격의 기회로 이용하면서 위기 극복은커녕 사회적 혼란만 증폭되고 있다.
지난달 26일과 이달 16일에 각각 천안함 피격 5주년과 세월호 참사 1주년을 맞았다. 천안함 폭침은 해군 함정이 북한의 기습공격을 받아 두 동강 나며 국가안보에 중대한 허점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어린 학생들의 희생으로 더 충격이 컸던 세월호 참사는 한국에선 누구라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음을 국민들에게 각인시켰다.
그러나 천안함 사건 이후 5년이 경과했는데도 국가안보가 전보다 튼튼해졌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우리 내부의 갈등과 불신만 이어지고 있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라는 정부의 조사 발표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47.2%로 ‘신뢰한다’는 대답(39.2%)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천안함이 미국 잠수함과 충돌했다는 등의 괴담은 아직도 돌아다닌다.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 가운데 5종이 천안함 사건을 일절 다루지 않고 있는 것은 기막힌 일이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같은 양상이 반복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한 듯 ‘성역 없는 진실 규명’을 주장하더니, 폭력 시위로 이어진 1주년 행사 때에는 ‘유족과 하나 되어 박근혜 정권 끝장내자’는 노골적인 구호까지 등장했다. 뼈아픈 위기를 겪으면서 얻는 것은 없이 모든 게 소모적 정쟁으로 귀결되고 있다.
우리 민주주의의 역사는 아직 짧다. 6·25 때 한국을 조롱했던 영국의 민주주의도 수백 년의 발전 과정을 거친 뒤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외부에서 수입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조선시대의 명분 중시 전통과 연결되면서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에는 선거 때마다 보수 진보 간에 접전이 벌어지면서 모든 위기적 사건을 권력 투쟁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흐름이 뚜렷하다. 민주주의의 토양이 되는 시민적 교양이나 법치주의를 갖추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의 ‘건강한 민주주의’는 미완성이다.
강대국 사이에 낀 한국에는 천안함이나 세월호 사건과는 비교도 안 될 위기가 언제든 닥칠 수 있다. 동아시아의 격동은 이제 시작이다. 지금과 같은 허약한 풍토에서 드높은 파고를 어떻게 헤쳐 나갈지 걱정스럽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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