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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 "그런데, 역사학자들은 뭐하고 있죠?" - 김기철 문화부 차장 (조선/ 150409)

설지선 2015. 4. 10. 09:35

[동서남북] "그런데, 역사학자들은 뭐하고 있죠?" - 김기철 문화부 차장 (조선/ 150409)



	김기철 문화부 차장 사진
▲ 김기철 문화부 차장
제주 출신 소설가 현길언 전 한양대 교수(국문학)는 아홉 살 때 4·3사건을 겪었다. 제주 남원읍 수망리 중산간 마을에 살던 그의 가족에게 군경(軍警) 토벌대는 저승사자였다. 동네에 들어온 토벌대는 겁에 질려 달아나는 주민들에게 다짜고짜 총질했고, 집을 불태웠다. 남로당이 일으킨 무장폭동 동조 세력으로 의심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친척집 제사에 가던 소년 현길언도 검문에 걸려 죽을 뻔했다. 토벌대원 하나가 다행히 할아버지를 알아봐 화를 면했다. 그는 셋째 삼촌이 4·3 직전 경찰에 투신한 경찰 가족이었다. 하지만 경찰 가족의 안위도 보장받지 못할 만큼 험한 세상이었다.

얼마 후 가족들은 남원면 해안 마을로 피란갔다. 이번엔 마을을 습격한 폭도들에게 할머니가 변을 당했다. 담을 넘어 피하려던 할머니를 청년 두엇이 달려들어 철창으로 아랫도리를 마구 찌른 것이다. 남원 마을 400호가 불타고, 60여명이 죽었다. 할머니도 후유증 때문에 두어 해 뒤 세상을 떠났다. 습격 얼마 뒤 지서(支署)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경찰이 붙잡은 폭도들을 데려와 유가족들에게 한(恨)을 풀게 한 것이다. 폭도들은 분노에 찬 유가족들의 몽둥이세례를 받으며 죽어갔다. 소년 현길언도 그 자리에 있었다.

다음 날 새벽, 할아버지는 지서에 찾아갔다. 아는 친척의 시신을 거둬주려 한다고 했다. 전날 처형된 시신들이 엉켜 있는 곳에서 할아버지는 막내 삼촌의 시신을 발견했다. 식구들은 그날 마을을 습격한 폭도 무리 속에 막내 삼촌이 끼어 있지는 않았을까 걱정했었다.

현 교수는 이런 가족사를 담담하게 들려줬다. 대부분 제주 사람들과 비슷한 분량의 고통일 뿐, 특별한 얘기는 아니라고 했다. 그가 몸으로 살아낸 4·3사건은 살아남기 위해 도망 다니다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2003년 노무현 정부 당시 발표한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는 '건국 초기 단선(單選) 정부 수립이라는 부끄러운 역사에 저항한 사건'으로 4·3을 규정했다. 제주도민의 수난사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맞선 정의로운 사건으로 둔갑한 셈이다.

현 교수는 재작년부터 자신이 발행인으로 있는 계간지 '본질과 현상'에서 노무현 정부의 '4·3사건 보고서'의 문제를 지적해왔다. '4·3 보고서'가 정치적 입맛에 따라 진실을 왜곡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제주 4·3 단체 등에선 "4·3사건을 폄훼한다"며 입에 담을 수 없는 모욕적인 언어로 그를 매도했다. 현 교수는 물론 4·3의 진실 밝히기를 그만둘 생각이 없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대체 뭐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이런 얘기도 들려줬다. 폭도가 마을을 습격한 날 고모 둘도 외양간에 숨었다가 한 폭도와 맞닥뜨렸다. 그 청년은 "여기 아무도 없으니 어서 가자"며 나가버렸다. 고모들은 무사했다. 할아버지가 누구였는지 물었다. 둘째 고모는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말할 수 없다"고 버텼다. 30년 후 고모는 현 교수에게 그 사람 이름을 말해줬다. 이미 세상을 뜬 같은 마을 청년이었다. "생명을 구해준 은인인데도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모른 척하는 것이 상책(上策)이라고 생각되어서…."

평범한 여자도 아는 4·3사건의 진실을 권력과 이념에 취한 역사학자들만 제대로 못 보고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