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평화국가', 꿈에서 깨어난 이후 / 정우상 논설위원 (2012/04/05)
미국 LPGA에서 활약하는 미야자토 아이(宮里藍)는 일본인의 자랑이다. 키 155㎝에 눈이 크고 피부가 까무잡잡한 그녀는 보통 일본인과 생김새가 조금 다르다. 그녀는 오키나와(沖繩) 사람이다. 북위 26도 선상에 있는 섬 오키나와는 위도상으로 하와이나 타이완과 비슷하다. 원래 이 땅에는 일본 본토인과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민족이 살고 있었다. 133년 전 역사의 추가 다르게 움직였다면 미야자토는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이 됐을지 모른다.
오키나와에는 '류큐(琉球)'라는 나라가 있었다. 일본은 1609년부터 류큐가 자신들의 속국(屬國)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서구 열강은 류큐를 일본과 다른 나라로 봤다. 류큐가 1854년 미국, 1855년 프랑스와 독립국가로서 조약을 맺은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1429년 통일왕조를 세운 류큐는 군대가 없는 비무장 국가였다. 그런 류큐가 500년 독립을 유지한 이면에는 무역과 외교가 있었다. 1609년 일본의 1차 침략 이후에도 류큐는 1년에 두 번 중국에 조공을 바쳐 해상무역권을 유지했고, 일본에는 중국 몰래 정치적인 예(禮)를 갖췄다. 현대적인 용어로 바꾸면 중·일의 세력 균형을 이용한 외교와 해상무역이 가져온 경제적 풍요로 평화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단행하고 중국이 열강들의 놀이터가 되면서, 류큐의 이런 정책도 한계에 달했다. 일본은 1879년 4월 4일 500명의 병력으로 류큐를 함락했다. 류큐에는 상선(商船) 수백 척이 있었지만 군함은 한 척도 없었다. 호위병들은 왕의 경호원이었지 군대가 아니었다. 평화의 섬나라는 이렇게 하루 만에 사라졌다.
'평화국가'라는 미몽에서 깨어난 류큐인들을 기다린 건 비극과 굴욕이었다. 1945년 3월,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은 오키나와를 본토 방어용 방패로 삼았다. 미국과 일본은 오키나와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류큐 주민의 4분의 1인 12만명 이상이 죽었다. 주민들은 '옥쇄(玉碎) 작전'이라는 명(命)에 따라 집단 자결하거나 일본군에 학살당했다. 오키나와의 주인은 전후(戰後) 미국으로, 1972년에 다시 일본으로 바뀌었다.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긴 채 주머니 속 공깃돌 취급을 당한 것이다.
2009년 총선에서 야당이던 일본 민주당은 오키나와의 후텐마(普天間) 미군기지를 섬 밖으로 이전하겠다고 약속했다. 민주당은 후텐마 기지의 안보적 가치를 알면서도 '평화의 섬 오키나와'를 내건 시민단체들의 장단에 맞춰 춤을 췄다. 그러나 선거 이후 이 문제로 미·일 관계가 악화되고 일본 전체의 방위계획이 흔들리자 공약을 파기했다. 미군기지 이전을 기대했던 오키나와 주민들만 상처를 받았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에는 한마디 못하는 사람들이 제주 해군기지에 대해서는 '평화'를 들고 나왔다. 해군기지를 입안했던 민주통합당까지 '야권연대'를 위해 이들과 손잡았다. 민주당이 500명 군대에 무너진 비무장국가 류큐의 비극과 제주 기지의 전략적 의미를 모를 리 없다. 제주에서 한국민주당은 후텐마 공약으로 국민을 기만했던 일본 민주당과 같은 궤도에 들어섰다. 하토야마 전 일본 총리는 공약 파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지만, 한국 민주당은 제주 기지 공약을 파기했을 때 어떤 책임을 질지 밝히지 않았다. 총선 이후에는 "언제 반대라고 했나. 재검토라고 했지"라는 궤변을 늘어놓을지도 모른다.
이제 민주당 앞에 놓인 길은 두 가지다. 제주 기지 공사를 정말 중단시켜 국가이길 포기하거나, 아니면 선거 때문에 거짓 약속을 했다고 털어놓고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오키나와에는 '류큐(琉球)'라는 나라가 있었다. 일본은 1609년부터 류큐가 자신들의 속국(屬國)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서구 열강은 류큐를 일본과 다른 나라로 봤다. 류큐가 1854년 미국, 1855년 프랑스와 독립국가로서 조약을 맺은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1429년 통일왕조를 세운 류큐는 군대가 없는 비무장 국가였다. 그런 류큐가 500년 독립을 유지한 이면에는 무역과 외교가 있었다. 1609년 일본의 1차 침략 이후에도 류큐는 1년에 두 번 중국에 조공을 바쳐 해상무역권을 유지했고, 일본에는 중국 몰래 정치적인 예(禮)를 갖췄다. 현대적인 용어로 바꾸면 중·일의 세력 균형을 이용한 외교와 해상무역이 가져온 경제적 풍요로 평화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단행하고 중국이 열강들의 놀이터가 되면서, 류큐의 이런 정책도 한계에 달했다. 일본은 1879년 4월 4일 500명의 병력으로 류큐를 함락했다. 류큐에는 상선(商船) 수백 척이 있었지만 군함은 한 척도 없었다. 호위병들은 왕의 경호원이었지 군대가 아니었다. 평화의 섬나라는 이렇게 하루 만에 사라졌다.
'평화국가'라는 미몽에서 깨어난 류큐인들을 기다린 건 비극과 굴욕이었다. 1945년 3월,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은 오키나와를 본토 방어용 방패로 삼았다. 미국과 일본은 오키나와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류큐 주민의 4분의 1인 12만명 이상이 죽었다. 주민들은 '옥쇄(玉碎) 작전'이라는 명(命)에 따라 집단 자결하거나 일본군에 학살당했다. 오키나와의 주인은 전후(戰後) 미국으로, 1972년에 다시 일본으로 바뀌었다.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긴 채 주머니 속 공깃돌 취급을 당한 것이다.
2009년 총선에서 야당이던 일본 민주당은 오키나와의 후텐마(普天間) 미군기지를 섬 밖으로 이전하겠다고 약속했다. 민주당은 후텐마 기지의 안보적 가치를 알면서도 '평화의 섬 오키나와'를 내건 시민단체들의 장단에 맞춰 춤을 췄다. 그러나 선거 이후 이 문제로 미·일 관계가 악화되고 일본 전체의 방위계획이 흔들리자 공약을 파기했다. 미군기지 이전을 기대했던 오키나와 주민들만 상처를 받았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에는 한마디 못하는 사람들이 제주 해군기지에 대해서는 '평화'를 들고 나왔다. 해군기지를 입안했던 민주통합당까지 '야권연대'를 위해 이들과 손잡았다. 민주당이 500명 군대에 무너진 비무장국가 류큐의 비극과 제주 기지의 전략적 의미를 모를 리 없다. 제주에서 한국민주당은 후텐마 공약으로 국민을 기만했던 일본 민주당과 같은 궤도에 들어섰다. 하토야마 전 일본 총리는 공약 파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지만, 한국 민주당은 제주 기지 공약을 파기했을 때 어떤 책임을 질지 밝히지 않았다. 총선 이후에는 "언제 반대라고 했나. 재검토라고 했지"라는 궤변을 늘어놓을지도 모른다.
이제 민주당 앞에 놓인 길은 두 가지다. 제주 기지 공사를 정말 중단시켜 국가이길 포기하거나, 아니면 선거 때문에 거짓 약속을 했다고 털어놓고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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