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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창] 임을 위한 행직곡 / 박범신 (한겨레 100523)

설지선 2010. 5. 23. 14:19


[삶의창] 임을 위한 행진곡 / 박범신

 

80년 봄에 나는 안양에 살면서 <풀잎처럼 눕다>라는 소설을 어떤 신문에 쓰고 있었다. ‘누아르’의 범주에 들 이 소설은, 내 딴엔 형체 없는 구조적 폭력이 ‘개인’을 어떻게 벼랑 끝으로 내모는지를 말하고자 썼는데, 그 구조적 폭력의 중심인물로 설정된 것은 ‘최장군’이라 불리는 예비역 대령이었다. ‘예비역’으로 설정하지 않았으면 응당 붙잡혀 갔을 터였다.

 

그때는 팩스조차 없던 시절이라 원고를 일일이 신문사에 직접 갖다줘야만 했다. 5·18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돌 때, 원고를 써 들고 일어나면 아내가 늘 문밖까지 쫓아나와 내 바짓가랑이를 잡아챘다. 말 한마디 잘못해도 붙잡혀 가던 시절이었다. 행여 외출한 내가 어디에 어떻게 연루될까 두려워 아내는 어린것을 팽개쳐두고 한사코 내 원고를 빼앗아 들고 스스로 신문사에 다녀오곤 했다.

 

‘5·18’이 ‘항쟁’을 넘어서 권력에 미친 자들에 의한 ‘대학살’이었다는 걸 확인한 것은 물론 봄이 다 지난 다음이었다. 그 잔인한 봄날, 아내의 손을 끝내 뿌리치지 못하고 집 안에 쭈그려 앉아 소설 써서 ‘밥’이나 벌어먹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후, 내 마음속에서 큰 짐이 되었다. 알고 보면 80년대 내가 더 많은 연재소설을 썼던 심리의 최저층엔 그해 봄, 비겁하게 뒷짐지고 있었다는 무력감과 자괴감이 이윽고 자학으로까지 확대되어 생긴 반어법적 결과인 면도 없지 않았다.

 

그해 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요즘도 나는 이렇게 묻는다. ‘5·18’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많아졌을 만큼 세월이 지났건만 내가 지고 있는 심리적 부채는 여전히 무겁다. 거창하게 ‘역사’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내가 더 고통스러운 ‘원죄’로 느끼는 것은 단순히 줄여 말하자면 ‘죽은 자’들을 향한 것이다. 그중엔 물론 시민군 대변인으로 전남도청에서 전사한 서른 살의 윤상원 열사도 있다. 최근 문제가 됐던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바로 그 사람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윤상원과, 1979년 노동운동의 현장에서 유명을 달리한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넋풀이’로 불렸던 곡으로서, 그 후부터 ‘5·18’은 물론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깃발이자 상징이 된 노래이다. 2004년 5·18 기념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악보 없이 시민들과 함께 불렀던 모습이 상기도 선연하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발빠른 경제적 성공이 경제개발의 굽잇길을 넘다가 앞서 죽은 자들에게 빚지면서 얻은 것이듯, 오늘의 민주화 역시 그 과정에서 제 한 목숨 아끼지 않고 바친 ‘죽은 자’들의 제단에 의지해 이룩된 것이라는 걸 누가 부정하겠는가. 죽은 자들이 말하는 것은 ‘부끄러움’을 인식하라는 것뿐이다. ‘산 자여 따르라’라고, 그들은 죽은 뒤에도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성찰과 반성 없이는 어떤 역사발전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5·18 기념식이 ‘임을 위한 행진곡’ 때문에 두 동강이 났다는 뉴스를 보면서 속이 뒤집힌다. 국가보훈처는 5·18 기념식의 노래로 ‘임을 위한 행진곡’ 대신 ‘방아타령’이나 ‘금강산’을 부르려 했다는 말도 들린다. ‘방아타령’이라니, 국가보훈처는 ‘5·18’이 무엇인지 모르는 게 확실하다. 아니면 일부 보도처럼, ‘새날이 올 때까지…’ 등의 가사가 ‘정권교체’의 의미로 해석될까봐 ‘정권’에서 보훈처에 요구했는지도 모른다. 이 ‘정권’이 그 정도로 속이 좁고 콤플렉스가 많단 말인가. 암튼 이 때문에 수많은 바늘들이 내 안으로 꽂혀 들어오는 것처럼 아프다. 그리고 앞이 캄캄하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중얼거려 보지만, 그놈의 ‘방아타령’이 오랫동안 명치 끝에 걸려 있는 내 부끄러움과 부채감만 오히려 더 무겁게 만들 뿐이다. 나도 세금을 꼬박 내는데, 정부가 뭐 한가지 제대로 도와주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