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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설지선-가황자료실/남인수★가요일생

[스크랩] 월북 작사가 조명암의 가족사진과 `조명암 시선집`(이동순 엮음)의 서평

설지선 2008. 3. 14. 09:28

 

실제 작사자로 알려진 조명암(本名: 趙靈出,1913 ~ 1993) 충남 아산 출신으로 모더니즘에 심취한 시인이자 연극인. 그리고 5백여곡의 노랫말을 지은 요즘 말로치자면 만능 엔터테이너였던 그는 월북작가로 낙인 찍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

 

조명암은 48년(미군정이 진보적 작가들을 탄압한다)는 이유로 단신 월북했다. 남편을 기다리던 부인 장경옥씨도 6.25가 일어난 51년 딸 남희. 용희를 데리고 북으로 넘어갔다.둘째딸 해령씨만이 경기도 할머니댁에 맡겨졌다. 북에서 조명암은 숙청당한 다른 예술인과는 달리 죽을때까지 (김일성賞 계관인) 이란 칭호를 받았다.

 

남한 가요계에선 조명암이란 이름을 거론할수 없었다. 지난 92년 조명암이 해금되자 남한의 유일한 혈육인 딸 혜령씨(52)는 조명암. 조영출. 이가실. 금운탄. 등의 이름으로 등록된 4백87곡의 선친 저작권을 되찾은 뒤 「꿈꾸는 백마강」「선창」「알뜰한 당신」「고향초」등 4곡에 대해서는 저작권자가 허위로 등록돼있다며 서울 지법에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글: 임형규) 

 

 

부산일보 1997년 8월7일(목) 섹션특집 :노래따라 삼천리: (문금옥 기자)
※ 남인수팬클럽 부산지부장 김태욱 제공.

 

조명암, 시인과 작사가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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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엮음 [조명암 시전집], 선2003

강헌

묵직한 촉감으로 다가오는 조명암의 시선집은 20세기 한반도를 살아냈던 예술 혹은 예술가의 하릴없는 운명의 포물선을 격렬하게 보여준다.


그는 모더니즘이 상륙하던 1930년대에 김기림과 동행했던 시인이면서 동시에 대중음악의 손꼽히는 작사가이기도 했다. 고급/저급으로 가르는 미성숙한 문화적 이분법이 식민지 지식인사회를 지배하던 시기에 조명암의 이같은 작업은 그 자체로 문제적이다. 그리고 그는 해방 후 저 치열한 해방공간에서 조선문학가동맹의 일원으로 숱한 극작활동과 연극무대로 뛰어들면서 일제말 <어머님 안심하소서>, <결사대의 아내>같은 친일 국민가요의 노랫말을 썼던 자신의 부역행위를 극복하고자 몸부림쳤고, 분단이 고착화하는 1948년 월북하여 또다른 인생의 막을 연다. 하지만 그는 임화와 김남천 그리고 김순남 같은 친 박헌영 계열의 남로당계가 아니었음인지 그들과 같은 처참한 숙청의 고초를 겪지 않았으며 1993년 5월 평양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북한 예술계의 주축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식민지에서 분단으로, 리얼리즘에서 모더니즘으로, 시인에서 대중음악의 작사가로, 극작가로, 그리고 친일에서 좌익으로, 남에서 북으로. 조명암의 궤적은 20세기 한반도의 문화예술이 성취한 영광과 상처의 뒤란을 두루 스쳐지나간다. 월북작가라는 낙인 때문에 한반도의 남쪽에서 오랫동안 그의 이름은 영어의 상태에 놓여있어야 했다. 88올림픽 직전 이루어진 월북작가의 해금조치에도 그의 이름과 작품은 거론되지 않다가(아마도 그가 당시 북한의 '현역'이었던 연유로 추정된다) 1992년에야 그의 노랫말 61편이 해금되면서 그의 존재는 공식화되기 시작했다.


이 [조명암 시전집]은 식민지 시대 그의 시의 대표작 <동방의 태양을 쏘라>를 비롯하여 북한의 '김일성상 계관인' 칭호를 수여받았던 시대의 시작품에 이르기까지 시인으로서의 그의 면모를 짚어볼 수 있는 전반부도 흥미롭지만, 아무래도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지점은 '가요시'라는 갈래용어로 그가 쓴 대중음악의 노랫말을 집결시킨 제2부가 될 것이다.


시인으로서의 조명암의 문학사적 의미도 만만친 않지만 작사가로서의 그가 자리하는 대중음악사적 가치는 단지 몇마디 말로서 정리될 수 없을 정도로 그 너비와 깊이가 자욱하다. 식민지 조선에 대중음악이라는 새로운 자본주의적 문화가 '유행가'라는 이름으로 착근되던 1930년대와 40년대에 걸쳐 작사가로서의 그의 지위는 한국 작사계의 거목 반야월과 쌍벽을 이룰만큼 공고하다.


1930년대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연대다. 1926년 윤심덕의 이른바 '현해탄 쇼크'(극작가 김우진과의 동반자살)로 인해 음반시장의 시대가 개막하고 이듬해 경성라디오방송국이 출현함으로써 본격적인 전파매체의 시대가 열렸지만 한국의 대중음악산업은 1935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전국적인 씬드롬을 불러일으키며 이른바 '트로트의 전성시대'를 열기까지 근 십년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 <목포의 눈물>을 시발점으로 일본 엥까의 2박자 중심적 리듬 패턴과 요나누끼 5음계라고 부르는 근대 일본의 단조 5음계에 기반을 둔 한국 최초의 주류 장르인 '트로트'가 식민지 조선의 대중의 청각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바로 이 1935년을 기점으로 삼사년간 집중적으로 초기 트로트의 고전들이 쏟아진다. <애수의 소야곡>, <눈물젖은 두만강>, <홍도야 우지마라>, <나그네 설움> 등이 그것이다. 조명암은 바로 이 싯점에 모든 편견과 질시를 무시하고 과감히 노랫말의 결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고운봉이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선창>과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이 바로 이 초기 트로트 전성시대의 조명암이 이룬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사실 숱한 '저급예술'이라는 혐오속에서도 트로트 음악이 한국 대중의 음악적 무의식을 지배해 온 데엔 이들 탁월한 작사가들의 설득력있는 표현능력이 큰 공헌을 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80년대의 대학가 노래운동을 주도했던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인 문승현(<사계>, <그날이 오면>등을 만들었다)은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인 '뽕짝'이 도대체 수십년동안 변치 않고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뇌하면서, 그 힘의 원천을 '뽕짝 리얼리즘' 곧 앙상하고 단조로운 음악형식 속에 담긴 일급 작사가들의 탁월한 형상화로 꼽았다. 이들 작사가들이야말로 트로트 불멸성의 일등공신으로, 그들의 가사는 평범한 서민들의 삶의 현장성을 설득력있게 묘파하는 한편으로 시대적 의제들을 관념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구체적인 일상성으로 해석해내는 데 있어 뛰어난 기술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반야월, 이부풍 그리고 조명암의 노랫말이 바로 그러하다. 조명암은 그의 초기시에서 보이는 일말의 현학성을, 노랫말의 영토에 오면 완벽하게 거세시킨다. 시 <동방의 태양을 쏘라>와 노랫말 <바다의 교향시>(손목인 작곡, 김정구 노래)를 비교해 보라. "가물가물 묽은 돛대 쓰러지는 수평선/ 섬아가씨 얽어주는 붉은 사랑 찾아서"같은 세번째 절의 대목은 섬세하고 창백한 지식인의 찌꺼기가 없다.


1940년대 일제말의 대표작 <진주라 천리길>, <꿈꾸는 백마강>, <서귀포 칠십리> 같은 노래에서 알 수 있듯이 조명암은 쉽고 간결하며 남성적이고 담백한 노랫말에 커다란 장기를 보인다. 그리고 골계적이며 해학적인 민요의 노랫말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이런 요소는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밝히는 데에도 대단히 주요하게 감안되어야 할 요소이다.


이 두꺼운 시집에서 마지막으로 눈길을 붙잡는 대목은 1939년에 이난영이 불렀던 <다방의 푸른 꿈>의 노랫말이다. 이 노래는 트로트 음계가 아닌 블루스 음계로 씌어진 최초의 노래로서 이난영의 남편이 되는 김해송이 만든 곡이다. 뿌연 담배연기가 자욱한 분위기로 시종하는 이 노래를 분기점으로 한국의 대중음악사는 서구적 근대로 본격적으로 이행한다. 바로 그 전환의 길목에 모더니스트 조명암이 싱긋 웃고 서 있는 것이다.

 

*자료; 창작과 비평 2003 가을호

출처 : 설지선의 옛노래방
글쓴이 : 설지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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