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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설지선-가황자료실/남인수★가요일생

[스크랩] [추억의 LP여행] 이난영

설지선 2008. 3. 14. 01:15
[추억의 LP여행] 이난영

1969년 한 시민의 성금으로 유달산에 세워진 ‘목포의 눈물’ 노래비는 대중가요로는 최초로 탄생된 노래비였다. 귀에 감기듯 애절한 콧소리로 민족의 울분을 노래했던 ‘목포의 눈물’의 주인공은 고(故) 이난영. 그녀의 노래는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는 민족의 슬픔과 울분을 대변하는 한의 가락이었다. 그래서 대중가수로는 드물게 민족가수로까지 추앙을 받았다.

그녀는 또 작곡가인 남편 김해송과 함께 한국 최초의 뮤지컬 악단 ‘KPK악단’을 창립, 우리 땅에 새로운 음악을 수혈한 개척자였다. 해외에서 명성을 날렸던 최초의 보컬 그룹 ‘김씨스터즈’와 ‘김보이스’를 키워낸 억척스런 어머니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이난영은 불행했다. 남편은 납북돼 생이별을 했고 홀로 남은 자신을 보살펴준 가수 남인수는 병으로 떠나보냈다. 비련의 여인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다가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그래서 더욱 잊을 수 없는 ‘트로트 명곡’으로 불려진다.

이난영(본명 이옥례)은 1916년 전남 목포 육전거리의 허름한 초가집에서 1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일자무식에 소문난 술주정꾼. 농사철이면 품앗이로 연명해야 하는 가난한 집이었다.

그래도 예술적인 ‘끼’와 ‘능력’은 타고 났는지 두 살 위인 오빠 봉룡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작곡가로 컸다. 그는 보통학교를 거쳐 2년제 심상고등과를 마친 뒤 목화공장의 직공으로 가계를 도왔고 이난영은 목포 공립보통학교를 4년 다닌 게 학력의 전부다.

어려서부터 노래 잘 부르는 꼬마 가수로 소문났던 그녀는 유성기 소리를 듣기 위해 일본인 집에 보모를 자청해 들어갔다. 매일 유성기 노래를 따라 부르는 그녀의 노래 재질을 알아본 일본인 주인은 순회 극단의 공연무대에 막간 출연을 주선해 주었다.

16살이 되던 1932년 어느 날, ‘태양극단’의 목포 공연 때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 정식 가수는 아니고 막간 가수였다. 박승희 단장은 그녀의 노래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 자리에서 극단의 일원이 되었다. 박 단장은 ‘이름이 촌스럽다’며 난영이란 예명을 지어 주었다. 태양극단의 막내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며 8개월 간 전국을 돌던 중 일본 오사카로 공연을 떠났는데, 갑자기 일본에서 극단이 해산돼 버렸다.

갈 곳 없는 이난영은 변두리 극장 분장실에 기숙해야 했다. 돌아갈 차비도 없어 떠돌이 신세로 전락했다. 그때 구세주가 된 사람은 오케이 레코드 사장 이철씨. 일본의 조선 레코드 특약점 주인이 이난영이라는 가수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자 귀가 번쩍 뜨인 이철은 수소문 끝에 떠돌고 있던 그녀를 찾아냈다. 직접 노래실력을 테스트한 후 1933년 오케이 레코드의 전속 가수로 그녀를 스카웃했다.

데뷔 SP 음반은 1933년 10월 발표된 ‘향수’다. 그녀의 노래가 처음 수록된 음반은 그 해 8월 태평레코드에서 발매한 창극 춘향전전집 SP음반(총 5장)이다. 여기에는 그녀의 첫 육성노래 ‘시들은 청춘’이 담겨 있다.

33년 11월 발표한 ‘불사조’는 이난영의 첫 히트곡. ‘불사조’에 이어 이듬해 2월 발표한 ‘봄맞이’가 또 다시 사랑을 받으면서 그녀는 단숨에 촉망 받는 신인가수로 떠올랐다. 그 해 가을 도쿄에서 열린 전국 명가수 음악대회에 한국인 가수로는 혼자 출전했는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34년 조선일보에서 전국 6대 도시의 ‘애향가’가사 모집을 했다. 3,000여 편의 응모작품 중 목포 출신 문일석이 응모한 ‘목포의 눈물’이 당선작으로 뽑혔다. 이 철 사장은 때 마침 멜로디가 마음에 들었던 손목인 곡 ‘갈매기 항구’에 이 가사를 얹어 이난영에게 취입시켰다. ‘갈매기의 항구’는 원래 남자 가수 고복수를 위해 만든 곡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뀐 ‘목포의 눈물’은 35년 이난영을 ‘가요계의 샛별’로 만들었다.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수 만장이 날개 돋힌 듯 팔렸다고 한다. 지금에야 100만장 판매를 우습게 이야기 하지만 유성기 시대에 수 만장은 대박 중의 대박이었다.

‘목포의 눈물’은 대 히트와 함께 목포 사람들의 자존심으로 자리를 잡았고 한 민족에게는 설움을 달래주는 민족 가요로 널리 불렸다. 이 인기를 바탕으로 이난영은 36년 ‘오카란코’란 일본 예명으로 일본 가요계에 진출해 데이지쿠 레코드에서 ‘이별의 뱃노래’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 노래는 ‘목포의 눈물’ 일본어 버전이다.

이난영은 37년 11월, 21살의 나이에 김해송과 결혼을 했다. 부부는 9남매를 낳았는데 두 자녀는 일찍 세상을 등졌고 맏딸 영자, 영조, 숙자, 영일, 상호, 태성 등 7남매는 후에 ‘김씨스터즈’와 ‘김보이스’라는 걸출한 대중음악 아티스트로 성장했다.

1940년까지 왕성한 음반 발표를 한 이난영에게 그 해 7월에 발표한 오빠 이봉룡의 곡 ‘목포는 항구다’가 마지막 히트곡이었다. 이후 태평양전쟁으로 생필품조차 부족한 현실 때문에 음반 제작보다는 무대공연 위주로 활동을 했다.

당시 그녀가 소속된 조선악극단은 오케이 레코드 직속으로 당시 최대 규모의 공연단체였다. 그녀는 가요사상 처음으로 여성보컬그룹 ‘저고리씨스터즈’를 결성, ‘조선악극단 무대의 여왕’으로 군림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이난영은 해방이후 7남매를 키우느라 가수 활동을 한동안 접어야 했다. 다시금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40년대 중후반 남편인 작곡가 김해송과 함께 KPK악단을 결성하면서 부터이다. 그녀는 최대규모의 악단으로 군림한 KPK악단에서 의상, 소품까지 손수 제작하는 억척스러움과 능력을 발휘하며 대모로 불리어졌다.

'진정한 한국의 뮤지컬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KPK악단은 1950년 4월 명동 시공관 '로미오와 쥴리엣'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산되었다. 한국전쟁 때 단장이었던 김해송이 납북 되었기 때문이다.

홀로된 이난영은 1.4후퇴 때 7남매를 거느리고 오빠 이봉룡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곳에서 오빠와 함께 남편의 땀과 정신이 담겨 있는 KPK악단의 재건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허사였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오빠 이봉룡이 'LKA 음반사'를 창설했다. 이난영과 이봉룡은 생계를 위해 음악 재능이 뛰어났던 숙자, 애자, 그리고 오빠의 딸 민자를 묶어 'KPK 쇼단'을 구성했다. 바로 여성트리오 '김씨스터즈'가 공식 출범 한 것이다. 이들은 수도극장등 민간 무대를 포함, 주로 미8군 무대에서 활동했다.

1950년대 말 뮤지컬 영화 '청춘쌍곡선'에 간호사 역할을 맡아 영화에도 진출했을 만큼 김씨스터즈의 인기는 높았다. 미8군 무대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김씨스터즈는 1959년 미국인 흥행사 '톰 볼'의 주선으로 꿈의 무대인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진출했다. 최초의 해외진출 여성 보컬 팀 탄생이었다.

자식들을 이역만리로 떠나보내고 혼자가 된 이난영은 외로움을 술로 달래기 시작했다. 이 당시 그녀의 쓸쓸한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던 사람은 동료가수 남인수. 전쟁 후 남편을 여의고 자식들 마저 타국으로 떠나보낸 뒤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녀에게 최고의 인기 가수 남인수는 경제적인 도움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남인수는 자신보다 2살 연하였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차츰 사랑으로 변해갔다. 예나 지금이나 말 많고 탈 많은 연예계에 두 사람의 로맨스는 참새들의 입 방아에 단골메뉴로 올랐다. 하지만 외로운 처지의 두 정상의 남녀가수는 그런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사랑을 키워나갔다.

남인수와의 사랑으로 꿈꾸듯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이난영에게 또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애인 남인수가 병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불치병으로 여겨지던 폐결핵이었다. 지극 정성으로 간호했던 그녀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남인수는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1962년 훌쩍 세상을 떠나버렸다.

또 다시 혼자가 된 이난영은 견디기 힘든 외로움에 절망했다. 성공한 자식들이 사는 미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생활을 시도해 보았지만 적응하기가 힘들어 1963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이 당시 김씨스터즈의 미국 활동장면이 담겨있는 필름을 가져온 이난영은 KBS TV에 이 필름을 건네주어 전국에 방영되었다. 화려한 김씨스터즈의 활약을 지켜본 대중에게 김씨스터즈는 단숨에 세계적인 보컬그룹으로 인식이 되었다. 이후 오빠 이봉룡이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버리자 이난영 역시 이민을 떠났다.

1950년대 말부터 SP음반과 더불어 10인치 LP음반이 탄생되며 새로운 음반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난영의 모든 노래들은 LKL레코드에서 10인치 LP와 12인치 LP로 복각이 되어 쏟아졌다.

특히 '목포의 눈물'이 수록된 음반은 재판 삼판을 찍을 만큼 여전히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미국으로 떠난 이난영은 지독한 향수병을 겪었다. 그녀는 납북으로 생이별한 남편 김해송과 연인이었던 서정가요의 제왕 남인수가 잠들어 있는 고국 땅을 잊을 수가 없었다. 견디다 못한 이난영은 결국 단신으로 서울로 돌아와 큰 아들 집에 머물렀다.

인생의 허무함에 몸서리쳤던 이난영의 유일한 친구는 술이었다. 1965년 9월 11일 새벽 이난영은 알코올 중독으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한 많은 생을 살아온 이난영은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어머니의 사망 소식에 김씨스터즈 세 자매는 망연자실했지만 빡빡한 스케줄 때문에 장례식에도 참석 못하는 불효의 한을 남겼다

그녀의 장례식은 한국연예협회장으로 치러졌다. 3년 뒤인 1968년 6월23일 오전 11시 '목포의 눈물'이라는 민족가요를 남긴 고 이난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목포 중앙극장(지금의 하나 백화점 자리)에서 제1회 난영가요제가 개최되었다.

어느 덧 '목포의 눈물'이 민족가요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게 되자 목포시 대안동에서 악기점을 운영했던 박오주씨가 당시로선 거금인 600만원의 기념 노래비 건립금을 기탁해 왔다. 1969년 6월10일 목포 유달산에 건립된 이난영의 ' 목포의 눈물' 노래비는 국내 대중가요사상 최초의 노래비로 탄생했다. 이 노래비는 목포를 상징하는 조형물로 목포시민들의 자존심이 되었다.

김씨스터즈 세 자매는 1967년 초 줄줄이 국제결혼으로 가정을 이뤄 안정을 찾자 1970년 5월 고국을 떠난 지 12년 만에 귀국해 5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소를 찾아 오열했다. 시민회관에서 열린 4일간의 귀국공연에서 어머니의 히트곡 '목포를 눈물'을 흐느끼며 부르자 공연장 전체가 울음 바다로 변했다.

1974년 11월 오아시스레코드는 '흘러간 가요계의 여왕 이난영'이라는 추모 LP를 발매하기도 했다. 이후 1979년 일본 매일TV에서는 <봉선화 필 때>라는 한국가요사 다큐멘터리 프로에 이 노래비를 비중 있게 다루기도 했다. 이후 목포의 문화 행사 때는 자연스럽게 '목포의 눈물'이 빠지지 않고 불리어지고 있다.

출처 : 설지선의 옛노래방
글쓴이 : 설지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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