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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설지선-가황자료실/남인수★가요일생

[스크랩] 플레이보이 미움의 세월-`여자의 일생`을 뒤돌아보니(3)

설지선 2008. 3. 13. 09:42

인생증언(56)

플레이보이 미움의 세월-'여자의 일생'을 뒤돌아보니(3)/주간여성(1974년 월호 미상)

 

'가거라 삼팔선'의 감격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조국 광복을 맞았다. 어느 분야에서 활약하던 사람들에게나 벅찬 감격을 안겨 주었다.

해방된 조국은 그러나 허리가 동강났다. 조국분단의 설움을 노래한 남인수의 '가거라 삼팔선'은 그래서 또 히트했다.

47년 9월 남인수는 '아시아'란 레코드회사를 설립했다. 미아리 공장을 차렸다. 레코드사 경영은 전 재산을 투입한 도박이었다. 당시 이 레코드사는 해방 직후 '신라의 달밤'을 불러 크게 히트했던 가수 현인이 시작한 럭키레코드사와 심한 경쟁을 벌이게 됐다.

경쟁은 파멸을 낳았다. 게다가 아시아는 제작기술까지 미흡했다. 낡은 레코드를 재생, 디스크를 뽑아내는 것이었는데 원형판에 재료를 녹여 부은 후 원형판의 한 쪽이 떨어지지 않곤 했다. 은하는 미아리 공장에서 공원들에게 밥지어 주는 일을 맡아 했다.

그러다가 6,25를 맞았다. 남인수는 군 연예대에 참가했다. 백인엽 장군이 제주도 모슬포의 제1훈련소장으로 부임할 때 남인수를 포함한 연예대원을 데리고 갔다. 1년 가까이 제주 생활을 했다.

제주에서 부산으로 나온 후 다시 남편의 무대생활이 시작됐다.

'서울 가는 십이열차에 기대 앉은 젊은 나그네...'

53년 환도가 시작되면서 나온 '이별의 부산정거장'. 남인수가 힘차게 부른 이 노래는 가족과 재산을 잃고 피난살이에 시달려 온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메아리졌다.

남인수 일가도 환도했다. 그러나 환도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또 병으로 쓰러졌다. 이번은 척추 카리에스란 병이었다. 남인수는 가족을 이끌고 고향 진주로 내려갔다.

진주로 내려갈 때 그는 척추를 움질일 수 없어 당구대 위에 반듯이 누어 트럭에 실려갔다.

고향에 온 그에게는 약값은 커녕 생계비마저 넉넉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아내 은하가 서울서 갖고 온 당구대를 펼쳐 놓고 당구장을 차렸다.

병석에 누운 남인수는 '사상의학'이란 한방서적을 구해다가 탐독했다. 그리고 약초를 사들이고 스스로 처방을 내어 탕약을 지어 먹었다. 1년을 가까히 꾸준히 탕약을 복용한 남인수는 마침내 병석에서 일어났다. 다시 상경한 그는 한때 을지로 3가에 '국제당구장'이란 당구장을 차렸다. 은하는 또 이곳에서 카운터로 일했다.

 

이난영 사건

 

59년 남인수는 대한가수협회를 결성, 초대 회장이 됐다. 그리고 선배가수 고복수시의 은퇴공연을 협회에서 주관했다.

'고복수 은퇴공연'은 은하의 운명에 치명적인 그림자를 던지는 계기가 됐다. 은퇴공연이 끝난 후 고복수, 김정구씨 등과 함께 불행한 선배가수들을 돕기로 약속했다.

첫 대상이 된 가수는 이난영(당시 47살). 6,25 때 남편 김해송씨가 납북되어 간 후 이난영은 실의에 빠져 그만 마약중독자가 돼 있었다.

그의 집을 방문, 참담한 생활을 하고 있는 이난영을 본 남인수는 어떤 책임을 느꼈다. "내가 그를 구해 줘야지."  남편은 그 후로 이난영의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리고 끝내 그를 마약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 남인수 자신은 이난영에게 중독되어 버렸다. 동거를 시작했다.

은하는 그만 절망해 버렸다. 결혼 20년 동안 남편의 바람기엔 체념하다시피 하며 살았지만 이런 사태 앞에선 남편에 대한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은하는 가정을 동댕이치고 친정인 마산으로 내려갔다. 마산엔 어머니 한 분이 살고 있었다. 친정에 내려가 은하는 서울과의 연락을 일체 끊고 '눈 감고 귀 막은' 생활을 했다.

4년 후인 62년 6월 큰딸이 달려왔다. 아빠가 위급하다고 했다. 남편이 쓰러지면 약광우리를 들고 달려가던 버릇대로 딸의 손목을 쥐고 상경했다. 남편은 메디칼선터에 누워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얼굴을 덮고 있었다.

"너무 늦었구나!"

그날로 퇴원수속을 밟고 충무로 5가 전셋집 2층으로 환자의 병상을 옮겼다. 퇴원한 지 여드레 만에 남인수는 고질적인 폐결핵으로 눈을 감았다.

장례식은 연예협회장으로 7월 1일 서울 조계사서 치뤘다. 은하는 이난영에게 함께 상복을 입어 주길 청했다. 식장에선 고인의 히트송 '낙화유수','애수의 소야곡'이 연주됐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에 은하는 '산홍'이란 전주 기생으로부터 보내진 조화 다발을 보았다. 산홍은 일찍이 은하가 본 일이 있는 기생이었다. 그는 남편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했었다. 남편을 따르는 여인들 중에선 밉지 않은 여자였다. 묘지는 고향 진주의 선영에 썼다.

남인수가 간 후 은하는 함께 상복을 입었던 이난영과 형제처럼 지냈다. 이난영의 나이가 위여서 오히려 은하가 그를 언니라고 불렀다. 이난영이 68년 세상을 떠났을 때 은하는 진정 슬퍼서 울었다. 이젠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시집 쪽으론 친척이 없었다. 남인수는 3대 독자였다.

김은하씨는 딸 둘, 아들 둘을 낳았다. 위로 딸들은 모두 출가했고 아버지 남인수의 장례식 때 12살짜리 상주로 동정 어린 시선을 모았던 맏아들 강대우군은 벌써 23살로 현재 공군에 입대, 군복무 중이다. 막내둥이 대익군은 올해 19살, 대학 1학년에 재학 중이다. (끝) <김인건 기자>

 

*자료/남인수팬클럽 회보 제1호(2002/09)

출처 : 설지선의 옛노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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