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증언(56)
플레이보이 미움의 세월-'여자의 일생' 뒤돌아보니(1)/주간여성(1974년 월호 미상)
왕년의 인기가수 남인수씨 부인 김은하(52)씨.
인기인의 아내는 슬프다. 30년대 대중의 우상이었던 가수 남인수, 그가 살아서 한창 화려했을 때 그의 주변엔 뭇여성들이 맴돌았다.
아내는 차라리 뒷전에서 외로움을 달래야 했다. 남인수는 한때 여가수 이난영과 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타계한 지 어언 12년, 미망인 김은하여사(52)가 회고하는 이 나라 대중가수의 '아내의 엘리지'는 구슬픈 가락으로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 분이 계시다면...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 보는 구슬픈 이 밤...'
레코드의 전성기인 1930년대를 휩쓸었던 노래 '애수의 소야곡' 첫 구절이다. 이 노래로 데뷔와 함께 가요계의 톱스타로 군림했던 가수 남인수. 그는 대중가수로선 가장 화려한 활동을 하다가 간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남인수'란 이름은 우리나라 가요계에선 남성가수의 대명사처럼 불리었다.
그 찬란하고 화려한 이름의 뒤 쪽, 그늘에서 살아 온 사람, 부인 김은하(52)씨는 그러나 지금 고인에 대한 원망과 후회를 씹으며 살고 있다. 그것은 고인 남인수가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남인수는 62년 6월 26일 45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부인 김은하씨는 그때 만 38살,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부인 김씨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을 지난 12년 동안 눈물로 달래 온 것이다.
젊은 시절의 가수 남인수는 또 화려하고 멋들어진 플레이보이였다. 화려한 인기인을 남편으로 섬겨 온 아내에겐 말 못할 비애가 있었다. 그 비애를 참고 견딘 것은 노후의 보상을 기대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인수는 생전에 이런 기대마저 짓밟았었다. 지금은 옛 사랑이 된 여가수 이난영과 숨지기 직전까지 4년간이나 살았던 것이다.
남편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이 깊을수록 부인 김씨의 남편에 대한 원망과 슬픔도 깊어진다. 그래서 부인 김은하씨가 살고 있는 서울 연희동 연희시범아파트 자택 안방에는 고인의 영정 한 장도 걸려 있지 않다. 고인이 미워서가 아니라 부인의 토라진 심사 때문이다.
"이젠 모두 쓸데없는 일이죠. 그 분하고 살 땐 내가 너무 어리고 철이 없었지요. 지금 그 분이 계시다면 멋지게 조종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부인 김씨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한숨 쉬듯 말한다.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 보는 구슬픈 이 밤....'
유명 가수와 결혼
김은하씨는 마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용환씨는 마산의 갑부로 지금도 나이 든 어른들은 그 이름을 기억한다. 우국지사였던 아버지 김씨는 어느 해인가 3월 1일 서울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일본 경찰에 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그 후 이갑성옹과 의형제를 맺기고 했다. 아버지는 오랜 형무소 생활을 하고 있었다.
14살에 마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은하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은하의 도일은 아버지가 부재중이어서 이뤄진 것이다. 아버지가 경영하던 동아일보 마산지국의 기자가 행선지 등을 주선해 주었다.
은하가 간 곳은 일본 동경에 있는 요시모도흥업이란 무용연구소였다. 보통학교 시절부터 춤을 잘 춘다고 해서 그의 도일을 알선해 준 기자가 선택해 준 곳이었다. 은하는 그 곳에서 아크로바트라는 일종의 곡예무용을 배웠다.
5년 후 빨리 귀국하라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았다. 19살의 처녀가 되어 귀국한 은하는 어머니를 붙잡고 울었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옥고를 치르고 있는 사이에 아버지의 심복이었던 사람이 맡겨 놓은 인감으로 재산을 모두 빼돌려 아버지가 출감, 귀향했을 때는 알거지가 되어 있었다. 파산과 일제의 감시를 견디다 못한 아버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중국으로 망명 이주했다.
은하가 귀국했을 때 어머니(지난 해 80살로 세상을 떠남)는 혼자 귀국, 딸 은하를 시집보내고 다시 춮국하기로 되어 있었다. 가족을 잃은 은하는 당시 신인 인기가수였던 남인수(본명 강문수)에게 소개됐다. 시어머니 될 사람이 마산 갑부 집 딸이라고 해서 은하를 맞겠다고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남인수는 진주 사람이었다. 은하를 소개받은 남인수도 열을 올렸다.
23살의 남인수와 19살의 은하는 진주 근흥관이란 큰 요릿집에서 결혼했다. 화려한 예식이었으나 친정 식구론 어머니만 참석한 쓸쓸한 결혼식이었다.
청진 기생의 방문
신혼생활은 진주 수정동 시댁에서 시작했다. 은하의 신혼생활은 그러나 꿈같이 단 것이 아니었다. 1개월도 채 못 되어 어두운 그림자가 찾아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 진주의 신혼가정에 청진 기생이 찾아왔다. 남편은 박정하게 그를 돌려보내지 못했다.
"당신이 이해해 주구려"
남편 남인수는 간곡하게 사정하며 청진 기생을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신부였던 은하는 펄펄 뛰며 거절을 해야 할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청진 기생과 1개월여를 한 지붕 밑에서 동거했다.
남편은 집에 있는 날보다 밖에서 지내는 날이 많았다. 공연하러 다닌다고 했다. 남편이 쟁쟁한 가수임을 알고 결혼한 은하는 이를 이해하려 했지만 참기가 어려웠다. 갓 결혼한 신부에겐 낯선 시집에서 남편 없이 홀로 지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어느 날 평양에서 급한 기별이 왔다. 남편이 공연 중에 쓰러졌다는 것이다. 19살 새댁의 가슴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평양에 달려간 은하는 남편이 고질적인 폐결핵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쓰러진 남편을 안고 진주로 돌아온 은하는 남편 간호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이때부터 은하는 폐결핵에 관한 의학지식을 쌓기 시작했다.
신혼 초에 겪은 이 두 사건은 은하의 곡절 많은 앞날을 암시하는 무서운 사건이었다. 동시에 이 두 사건은 은하와 남편 남인수를 애정으로 묶은 사건이기도 했다.
은하는 청진 기생이 집에서 나간 후 결혼생활에 실망하고 집을 뛰쳐나갔다. 당시 안익초씨(작고한 한국계 스페인 음악가 안익태씨의 형)가 이끄는 '약초악극단'에 참여했다.
처녀시절 일본에서 배운 무용 솜씨가 밑천이었다. 가출한 아내를 백방으로 수소문한 남인수가 서울 모처에서 은하를 발견, 다시는 딴 여자를 가정에 끌어들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집으로 데리고 갔다. 불과 가출 1개월 만에 가정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은하는 남편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품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평양에서의 각혈사건이 났다. 병원에 입원하기를 거부하며 아내 옆에서 치료하겠다고 남편은 어린아이처럼 우겼다. 병든 남편 남인수를 팔에 안고 있던 은하는 그 놀라움과 공포 가운데서 남편의 애정을 발견했고 애정을 쏟기 시작했다.
"이 분은 내가 옆에서 간호하지 않으면 언제 숨질지 모를 사람이다."
남편 남인수에 대한 은하의 헌신적인 애정이 시작된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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