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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설지선-가황자료실/남인수★가요일생

[스크랩] 플레이보이 미움의 세월-`여자의 일생`을 뒤돌아보니(2)

설지선 2008. 3. 13. 09:42

인생증언(56)

플레이보이 미움의 세월-'여자의 일생'을 뒤돌아보니(2)/주간여성(1974년 월호 미상)

 

애정에 눈뜬 부부

 

결혼 1년 7개월 만에 두 사람은 서울 현 경기고교 뒤 가회동에 집을 사고 서울로 이사했다. 애정에 눈을 뜬 두 사람은 떨어져 지내는 것이 서로 괴로웠다.

한옥이었던 가회동 집은 넓고 좋았다. 가수 남인수는 성격적으로는 지극히 꼼꼼한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집을 잘 꾸몄다. 또 주택은 넓고 좋은 것만 샀다. 서울로 이사했을 때의 남인수는 어마어마한 인기를 휩쓸고 있었다.

그가 노래를 시작한 것은 34년께부터였다.(주- 36년 데뷰가 옳음) 처음 남인수는 시에롱레코드사에 전속됐다. 첫 노래는 박시춘 작곡 '눈물의 해협'.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동경의 동해상업학교를 졸업한(주-미확인 사항임) 남인수는 36년 OK레코드사로 옮겨 '사랑도 싫더라 돈도 싫어', '범벅 서울'을 불렀다.

박시춘씨는 '눈물의 해협'에 가사를 새로 붙여 남인수에게 다시 부르라고 했다. 작사자는 이부풍씨. 제목을 '애수의 소야곡'으로 달았다.

가사를 바꾼 이 남인수의 데뷰곡은 큰 히트를 기록했다. 뒤를 이어 '꼬집힌 풋사랑', '낙화유수', '물방아 사랑' 등 연달은 히트곡을 내놓았다.

남인수가 결혼하던 41년께 그는 가요계의 톱스타가 되어 있었다. 가회동 집엔 내객이 들끓었다. 당시 남인수의 가족이라곤 갓 낳은 첫딸까지 쳐서 3식구였으나 집안엔 항시 20여 명의 식구가 북적댔다. 가수지망생, 무작정 상경 소녀 등 군식구들이었다. 이들의 뒷바라지를 은하는 싫은 기색 없이 해 주었다.

남인수는 돈을 잘 벌었다. 번 돈은 또 꼬박꼬박 아내에게 갖다 주었다. 보통 1달에 1천원을 들여놓곤 했다. 전국으로 순회공연을 다녔고 심지어 만주까지 공연하러 다닌 남인수는 공연 스케줄만 빠지면 꼭 가정에 돌아와 안정하곤 했다. 이렇게 돌아올 적마다 몇 천 원씩 아내에게 내놓곤 했다.

레코드상에서 나오는 돈은 남인수 자신은 얼마나 되는지 모르고 지냈다. 그것은 은하의 소관업무였다. 레코드사에선 매월 2백 원이 월급으로 지급됐고 레코드 판매 기록에 따라 1더블당 몇 전이란 인세가 지불됐다.

은하는 이 돈을 차곡차곡 은행에 저금하곤 했다. 이 돈은 남편의 치료비와 세간 장만에 쓰였다.

 

술담배 못한 남인수

 

은하는 살림을 지나치리만큼 알뜰히 했다. 당시 그만한 수입이면 상류생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은하는 극성을 부렸다. 식모도 두지 않으려 했다. 장작을 손수 패기도 했다.

당시의 연료는 장작과 조개탄, 연탄과 진흙을 사다가 물에 반죽하여 조개탄을 손수 만들어 말려 땠다.

또 장작은 당시 뚝섬에 들어오는 뗏목을 구입, 패서 썼다. 뚝섬에 들어온 원목을 트럭에 싣고 은하는 그 원목더미에 앉아 이리저리 흔들리며 가회동 집으로 갖고 온다. 마당에 끌어들인 원목을 장작 패는 품팔이꾼을 사서 모두 때기 좋게 팬 다음 뒷마당에 마르기 좋도록 쌓아서 말린 후 광에 적재해 놓고 한 겨울 동안 쓰곤 했다.

그것은 은하의 극성이었다. 아예 때기 좋게 패서 말린 장작을 사는 것보단 싸다고 해서 그 고생스러운 연료 장만을 하곤 했던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의 살림꾼다운 천성이 작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이때 은하의 생활은 행복했다. 남편이 집을 비우는 지방공연 생활도 여전했고 기생이 졸졸 따라디는 것도 여전했다.

그러나 남편은 가정을 중심으로 생활했고 아내에게 애정을 쏟고 있었다. 지방공연 도중에 급한 기별이 오면 은하는 마치 의사가 진료가방을 들고 왕진 나가듯 약품상자를 들고 달려가곤 했다. 남편은 공연지에서 혈담이 조금만 나오면 아내에게 통지하곤 했다. 남편은 그만큼 의사보다도 아내를 신뢰하고 있었다.

은하는 남인수가 쓰러지면 조용히 쓰다듬고 요양시켜 다시 일으키곤 했다. 그랬기 때문에 남인수는 또한 아내 은하의 건강을 끔찍히 존중했다. 아내 은하가 장작을 패는 현장을 보면 펄펄 뛰곤 했다. 식모를 꼭 고용하도록 했기 때문에 은하는 남편이 있을 때는 부엌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남인수는 도박을 좋아했다. 도박으론 할 줄 모르는 것이 없었다. 당구 실력 3백 점이 란 것은 '짜다'는 것과 함께 잘 알려진 일.

경마, 개경주 등에도 재미를 붙이곤 했다. 경마장엔 꼭 아내를 동반했다.

카메라 촬영에도 재미를 붙여 독일제 라이카 등 고급 카메라를 수집하기도 했다.

시계는 1년에 한 번씩 새 것으로 갈아 찼다.

술은 마시지 못했다. 담배도 피우지 못했다. 담배를 배우고 싶어 냉수를 떠다 놓고 배우려 했지만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연애'는 잘 했다. '졸졸 따르는'여자들이 많았다. 특히 기생들에게 가수 남인수는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인정 많은 남인수는 이들을 매정하게 뿌리치지 못해 '연애'를 해 주곤 했다. 기생들의 인기를 끌었던 것은 '꼬집힌 풋사랑' 등 기생의 탄식을 소재로 한 노래를 많이 불렀던 탓이기도 했다. 이런 남편을 위해 은하는 항상 마음을 썼다. 내복도 깨끗하게 입혔다. 외도할 때 내복이 정결해야 남편이 여자 앞에서 떳떳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외도하고 돌아오는 남편에게 싫은 기색도 하지 않고 싫은 말도 하지 않았다. 울컥하는 성미가 있는 남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성나게 하면 오래 살지 못할까 봐 속을 누른 것이다. 이렇듯 스스로의 울화를 꾹 누르고 사는 은하는 때론 밥맛을 잃곤 했다. 식사를 제대로 못하면 젖이 잘 나오지 않아 또 고생을 해야 했다. (계속)

 

출처 : 설지선의 옛노래방
글쓴이 : 설지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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