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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설지선-가황자료실/남인수★가요일생

[스크랩] 남인수와 이난영/작곡가 손목인의 회고

설지선 2008. 3. 11. 10:12

건강상의 이유로 나는 60년 3월 오랜 일본에서의 활동을 일단 중단하고 귀국했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던 국내의 팬들과 주위의 여건은 나를 가만놔두지 않았다. 공연은 계속 돼야했다.

'브라보 손목인 귀국공연'이란 타이틀을 내걸고 우리 단원들은 서울, 대구, 부산 등 순회공연을 가졌다. 조선악단을 비롯해 이인범무용단, 남인수, 이난영, 장세정, 오정심, 김정구, 프랭키 손, 이종철, 박옥초, 신카나리아등이 단원이었고 전체적인 공연의 주제는 세계여행이었다. 세계 여러 국가의 풍물을 배경으로 그곳의 분위기를 살린 음악을 선보이는 것이었다. 가는 곳마다 공연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부산제일극장에서 공연을 가질때 주요멤버였던 남인수와 이난영이 빠진 일이었다. 우리의 공연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남인수와 이난영을 빼돌려 제일극장 바로 앞에 있는 부산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다.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지만 공연도중이라 어쩔수 없었고 남인수와 이난영은 한동안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남인수와 이난영은 함께 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난영은 전남편 김해송이 납북돼 행방불명이 됐을때 한동안 그 사실을 믿지 않았고 그가 반드시 돌아오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김해송은 의정부에서 비행기 폭격으로 사망한 사실이 같이 끌려가던 사람이 그의 타다 남은 옷자락을 들고와 밝혀졌다. 그제서야 이난영은 고개를 떨구고 흐느꼈다. 당시 납북된 연예인들은 셀수도 없이 많았는데 신카나리아 같은 경우는 납북돼 끌려가다 비행기 폭격을 당하는 순간 죽은 시늉을 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왔다고 한다.

김해송의 죽음이 확인된후 이난영은 오랫동안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나 정이 많고 착하기 그지없는 그녀는 누군가 옆에 있어야만 했다. 이때 나타난 인물이 남인수였다. 그는 알려진대로 고음(高音)가수로 당시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었다.

남인수는 내가 전속작곡가로 있던 OK레코드사에 들어와 처음 부른 곡이 '사랑도 싫소, 돈도 싫소'등 내 곡이어서 인상적이었던 후배였다. 당시 OK레코드사에는 고복수, 장세정, 이난영등이 남인수와 함께 간판스타로 있어 단연 톱을 달리고 있었다.

남인수는 이난영과 결합하던 시절 이미 지병인 폐병이 깊어져 있었는데 오히려 그러한 면이 이난영의 착한 마음에 묘한 매력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이난영이 김해송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자매 김시스터즈는 남인수와의 결합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고생하는 어머니가 보기에 안돼 자신들이 활동하던 미국으로 몇번이나 불러들이려 했으나 남인수와 함께 있어 못가게 되자 딸들의 불평은 대단했었다.

남인수는 이난영을 만나기전 이미 본처와 자식들까지 있었는데 폐병이 극도로 악화돼 죽기 얼마전에는 이난영을 시켜 본처에게 연락하도록 했다. 조강지처를 버리고 이난영과 살고 있던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려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한번 보자는 것이었다. 본처를 병상에 불러들인 그는 속죄한다는 뜻에서 이난영과 살던 집한채를 그대로 주어버렸다. 이난영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묵묵히 따랐던 것을 보면 그녀의 착한 성격을 알만하다.

아무튼 생전 남인수의 무대인기는 대단했고 그만큼 괴팍한 면도 많았다. 몸이 편치 않다보니 남을 미처 생각해줄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이해되는데 신경질적인 모습을 자주 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번은 무대뒤에서 공연에 관해 뭔가 이야기를 했는데 짜증을 내 순간 따귀를 한대 후려갈겨 버린 적도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던 남인수는 무릎을 꿇고 앉아 "제가 죽을 죄를 졌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손선생님"하면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이 50도 채못돼 세상을 하직한 그를 좀더 따뜻하게 대해줬을걸 한다.

노래로는 성공했지만 가정적으로는 숱한 마음고생을 하며 살아갔던 이난영은 65년 봄 그녀가 한많은 세상을 떠난 날만은 보상을 받은듯하다. 5.16이후 박정희정권이 들어선 당시 상황은 집회가 금지돼 있어 연예협회가 수장으로 치르길 원하는 연예인들의 생각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허가를 해주지 않는 것을 보다못한 나는 "온국민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준 우리의 가수 이난영이 마지막 가는 모습을 누구나 보고 싶어하는데 왜 집회를 허가해주지 않느냐"며 사방을 쫓아다녔다. 결국 이난영의 장례식은 특별케이스로 허가됐다.

이난영의 집이었던 회현동에서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까지 모든 연예인들이 상복을 입고 뒤를 따랐다. 그날은 주변 교통이 모두 통제됐고 시내에는 그녀를 보러 나온 시민들로 가득찼다. 무리들은 <목포의 눈물>을 합창하며 걸었고 모여든 시민들도 하나둘 따라하더니 온통 <목포의 눈물>을 흐느끼듯 불러댔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에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인가 목포의 설움'

<목포의 눈물>이 이토록 구슬프게 들렸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고향 목포, 본명은 이옥례(李玉禮)로 작곡활동을 하고 있던 오빠 이봉룡씨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천재소녀가수'로 불렸던 그녀는 <목포의 눈물>과 함께 그렇게 갔다.

<목포의 눈물>은 60년대초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는데 감독은 하한수였고 전옥이 주연을 맡았었다. 주제음악은 역시 내가 맡았었는데 당시 에피소드 한토막.

주제음악제작을 위해 감독, 카메라맨등 제작진들과 함께 목포로 내려갔었는데 목포역 출구에 철조망이 쳐져있고 경찰에서 일일이 신분증을 검사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신분증을 보여주고 다 역출구를 통과하고 있었으나 나는 신분증을 소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포의 눈물>의 다른 제작스태프들은 목포역을 다 빠져나가고 있는데 나혼자만 쭈삣거리며 남아있자 신분증 검사를 하던 경찰이 수상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다가왔다.

"당신은 왜 나가지 않고 있어"반말조로 그는 내게 말을 붙였다. "어디 신분증 조 봅시다" "죄송하지만 없습니다" "당신이 대한민국 사람이야, 이름이 뭐야" 그는 온갖 인상을 다써가며 아주 허리춤가지 잡아챌 기세로 나왔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손목인이라고 합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갑자기 얼굴표정이 변한 그는 "아니,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손목인선생 이시라구요, 틀림없습니까"하고 되물었다.

 

나는 그에게 <목포의 눈물>영화촬영을 위해 목포에 내려왔다고 이야기했고 그는 <목포의 주인공>이 왔는데 몰라봐서 죄송하다고 몇번이고 사죄했다. 내가 음악을 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어수정님(남인수팬클럽 고문)의 추가 부분

 

1992년 5월 2일에 '도서출판 HOTWIND'에서 발행한 "손목인의 인생 찬가 - 못다 부른 타향살이" 115면에서부터는 더 자세히 실려 있네요(물론, 연재물이었다가 뒤에 책으로 내면서 보완하기 마련이라 그렇게 되었겠지만).
뒤늦게나마, 누락된 부분에 대해 보충-보완이랄까 좀 해야겠기에 다음과 같이 몇 자 끼워넣기를 하겠습니다. 남인수 선생의 타계한 달이 5월로 되어 있는 등 잘못된 부분도 있지만요.

("1957년 3월 귀국하자, 여러 신문 잡지에서 '손목인 돌아왔다.'는 기사를 비중 있게 다루어 주었다. ---<중략>---.") 이어서,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부산제일극장에서 공연을 가질때 주요멤버였던 남인수와 이난영이 빠진 일이었다. 우리의 공연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남인수와 이난영을 빼돌려 제일극장 바로 앞에 있는 부산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다.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지만 공연도중이라 어쩔수 없었고 남인수와 이난영은 한동안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남인수와 이난영은 함께 살고 있는 상황이었다." 라고 한 부분 :

"부산 제일극장에서 공연을 가질 때였는데, 골든 멤버라고 할 수 있는 남인수와 이난영이 말도 없이 출연 펑크를 낸 것이었다. 알고 보니 우리의 공연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남인수와 이난영을 빼돌려 제일극장 옆에 있는 부산극장에 쇼를 붙인 것이었다. 남인수와 이난영도 나름대로 사연이 있었겠지만, 퍽 섭섭했다. 그 때 남인수와 이난영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때라, 그들이 빠진 공연은 김이 샐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극장 입구에 양해를 구하는 안내문을 써붙이고 남인수와 이난영이 빠진 채 공연을 강행하였다. 부산 팬들은 그래도 이 손목인이의 이름 석 자를 잊지 않았는지, 극장을 가득 메워 주었기에 성황리에 진행될 수 있었다. 지금도 그 때의 아찔했던 일을 생각하면,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릴 것만 같은 심정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남인수와 이난영은 한동안 내 앞에 나타나지 못했다. 이 두 사람이 짝궁이 되어 펑크를 낼 수밖에 없었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 때, 두 사람은 때늦은 밀회에 빠져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이어서,

"이난영은 전남편 김해송이 납북돼 행방불명이 됐을때 한동안 그 사실을 믿지 않았고 그가 반드시 돌아오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김해송은 의정부에서 비행기 폭격으로 사망한 사실이 같이 끌려가던 사람이 그의 타다 남은 옷자락을 들고와 밝혀졌다. 그제서야 이난영은 고개를 떨구고 흐느꼈다. 당시 납북된 연예인들은 셀수도 없이 많았는데 신카나리아 같은 경우는 납북돼 끌려가다 비행기 폭격을 당하는 순간 죽은 시늉을 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왔다고 한다." 라고 한 부분 :

"이난영은 전 남편인 김해송이 납북돼 행방불명이 됐을때 한동안 그 사실을 믿지 않았고 그가 반드시 돌아오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김해송은 친일 행적과 미8군 위문 등의 죄목으로 북으로 끌려가던 도중, 의정부에서 비행기 폭격으로 사망한 사실이 같이 끌려가다가 탈출한 사람에 의해 확인되었다. 김해송의 타다 남은 옷자락을 들고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그제서야 이난영은 고개를 떨구고 흐느꼈다고 한다. 당시 납북된 연예인들은 셀수도 없이 많았는데 신카나리아 같은 경우는 납북돼 끌려가다 비행기 폭격을 당하는 순간 죽은 시늉을 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왔다고 한다. ---<중략>---" 그 나머지 부분 :

"12. 이난영과 남인수의 눈물로 끝난 사랑

본명이 호적상에는 강문수(姜文秀)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최문수(崔文秀)로 알려지고 있는 남인수(南仁樹)는 나와는 고향이 같은 진주다. 내가 오케레코드 전속 작곡가로 있던 35년 오케레코드를 통하여 처음 발표한 노래가 내 작품인 <사랑도 싫소 돈도 싫소>였기에 더더욱 인상적인 후배였다. ---<중략>---.

지금 생각하면, 50 살도 안 된 아까운 나이에 요절한 그를 좀더 따뜻하게 대해 주지 못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남인수는 1962년 5월, 45 세를 일기로 우리와 길을 갈라섰다.---<후략>---."

 

출처 : 설지선의 옛노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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