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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설지선-가황자료실/남인수★가요일생

庶民의 진정한 벗이었던 歌手 南仁樹/ 李東洵 敎授 (팬클럽 고문)

설지선 2008. 1. 29. 05:01

庶民의 진정한 벗이었던 歌手 南仁樹/월간조선 연재 : 李東洵 敎授의 歌謠 이야기(제3회)


민족사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노래 한 가지로 민족의 고통을 쓰다듬고 위로해 주었던 가수 南仁樹(1918-1962). 오늘은 살아생전 너무도 유명했었고, 세상을 떠난 후에는 삶 자체가 하나의 神話가 되어버린 아름다웠던 歌客의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나이 지긋하신 분이나 젊은 청년들에 이르기까지 남인수가 불렀던 히트곡 [哀愁의 소야곡]과 [가거라 三八線] [離別의 부산정거장] 등을 한 小節쯤 흥얼거리지 못하는 이는 아마도 없을 줄 안다.

남인수가 일생을 통하여 취입한 노래는 헤아려보지 않아 뚜렷이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어림잡아 일천 곡 가량 된다고 한다. 남인수 노래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란 어려운 일이나 우울하고 암담한 시간의 저 밑바닥 深淵에 가라앉아서도 결코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한 인간의 다부지고 결연한 목소리. 단단하지만 딱딱하지 않고, 카랑카랑하지만 애수와 정감으로 둘러싸인 목소리. 바로 그것이 남인수 聲音의 핵심이 아닐까 한다.

남인수가 이런 목소리를 갖게 된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혹독한 가난을 겪었고, 타국 땅에서 소년 노동자로 갖은 천대와 멸시를 겪은 체험이 그의 삶과 노래에 肉化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래를 부를 때도 고통받는 민족의 현실을 생각하였고, 보다 훌륭하고 적절한 성음을 만들기 위해 성악가 安基永에게 찾아가서 發聲法 지도를 받았던 일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가 한 사람의 가수로서 단지 개인적 삶에만 치우치지 아니하고 민족에게 사랑을 받는 가수가 되기 위해 애를 썼던 노력형의 가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남인수의 노래가 가장 아프고 절절하게 다가오는 시간은 어딘가에 시달려 심신이 몹시 피로하거나 곤비한 시간이다. 아니면 고단한 나그네길에서 돌아오는 경우라도 어울린다. 이러한 저녁 시간, 버스나 기차의 붐비는 공간이라면 더욱 어울린다. 이러한 시간에 성능이 보잘 것 없는 차량 스피커에서 뿌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뒤섞여 들려오는 정겨웁고도 카랑카랑한 목소리. 그것이 바로 남인수다.

사람들은 한쪽 손바닥으로 볼을 받치고 눈조차 지그시 감으며 덧없는 상념에 빠져들어 흘러간 청춘의 고달픔을 반추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아기의 칭얼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려와도 좋다. 이런 庶民的 소란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아련히 들려오는 목소리가 바로 남인수의 노래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남인수의 노래는 대개 流浪과 鄕愁, 청춘의 애틋한 사랑과 과거의 회상, 인생의 애달픔 따위를 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노래를 멋지게 불러대는 남인수의 성음은 어딘지 모르게 금속성의 분위기가 느껴지지만, 그 느낌은 금속 특유의 차디찬 냉기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따스함이 깃들어있다. 한참 가사를 따라가며 새겨듣노라면 왠지 눈에 눈물이 핑 돌 것만 같다.

그와 동시에 살아가는 일이 왈칵 서럽고 쓸쓸한 생각이 들면서 급기야는 무질서하게 방치되어 있는 나의 삶을 다시금 새롭게 정리하고 싶은 팽팽한 의욕과 긴장이 불끈 일어나서 마치 성난 닭처럼 정신의 깃털을 곤두세우게 된다.

남인수가 이렇게 庶民들에게 정겨움과 친근감을 주는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幼年 시절부터의 그의 생애가 고통과 파란으로 얼룩진 고단한 것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제철공장에서의 고단했던 노동자 체험은 그의 노래를 더욱 단련시키는 힘의 원천이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그의 고향은 경남 진주이다. 이 지역은 이미 작곡가 李在鎬를 비롯하여 藝能 방면에서 활동하는 많은 名人들이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원래의 본명은 崔昌洙였다. 어려서 부친을 잃고, 어머니가 어린 자녀를 데리고 강씨 문중으로 改嫁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라서 姜文秀로 이름을 바꾸었다. 하지만 양부 밑에서의 생활이 편할 리 없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설움과 구박 속에 시달리다가 어느 날 얼마간의 돈을 훔쳐서 무작정 집을 떠나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게 되었다. 일본에 도착한 후에는 어떤 선량한 사람의 소개로 사이타마縣에 있는 電球 공장에 취직하여 소년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생산 공장들의 작업 현실은 노동자들에게 너무도 가혹하고 힘겨운 악조건이었다. 그리하여 강문수는 이곳 저곳을 옮겨가며 노동자 생활을 이어 나갔다. 십대 후반의 나이가 되자 제철 공장의 노동자로 취업하여 한동안 쇠를 다루는 일을 하였다. 쇳물을 다루는 중노동을 하는 가운데서도 강문수는 타고난 藝人의 <끼>를 유감 없이 발휘하였다.

일본 가수들의 노래를 멋들어지게 따라 불러서 주변 노동자들로부터 가수의 칭호를 들었다. 그러다가 나이 열일곱 살이 되자 드디어 가수가 되려는 꿈을 안고 서울로 돌아와 시에론레코드사의 문을 두드렸다. 1935년 5월의 어느 날이었다고 한다.

당시 시에론레코드사의 文藝部長은 극작가이자 작사가인 朴英鎬가 맡고 있었다. 이때 강문수의 복장은 일본식 <쯔메에리> 차림의 떡꺼머리 총각이었다고 전한다. 또 어떤 자료에는 금단추 제복을 한 더벅머리 청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금단추 제복>이란 다소 과장된 서술이 아닌가 한다. 제철공장에 다니는 소년 노동자의 신분으로 모처럼 서울행을 결심하였으므로 비교적 깨끗한 용모를 갖추려 노력했을 터이고, 그래서 중학생의 교복을 구하여 입고 단정한 차림으로 상경하였으리라 짐작된다. 박영호는 이 청년의 자질을 잠시 테스트한 다음 작곡가 朴是春에게 데리고 갔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이 바로 韓國歌謠史의 흐름을 바꾸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 박시춘은 강문수의 음악적 자질을 발견하고 감탄하였다. 그리하여 곧 [눈물의 海峽]을 연습하여 취입시켰다.

현해탄 푸른 물에 밤이 내리면/ 임 잃고 고향 잃고 우는 저 배야

하지만 이 음반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그다지 시원치 않았다. 이때 박시춘은 소속 회사를 오케레코드로 옮기면서 이 노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곡은 그대로 살리되 가사만 바꾸어서 새로 발표하는 계획을 가졌다.

改詞는 文壇의 작가 출신인 李扶風이 맡았다. 곡명도 [哀愁의 小夜曲]으로 바꾸었고 가수로서의 이름도 강문수에서 남인수로 새로 바뀌었다. 남인수는 오케레코드 전속으로 곡조는 같지만 가사가 다른 이 노래를 다시 취입하였다. 그런데 이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폭발적 인기를 얻어서 남인수는 가수로서 단번에 최고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음반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음반 판매점에서는 가게 앞에 留聲機를 내다 놓고 달콤하면서도 애절한 음색으로 불러 넘기는 남인수의 그 노래를 날마다 연속으로 틀고 또 틀었다. 언론들은 남인수의 목소리를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美聲의 가수 탄생>을 연일 보도하며 남인수의 출현에 대한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달빛을 보면/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 소리

남인수는 무대에 오를 적에 항시 새하얀 플란넬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매는 스타일을 즐겼다. 이 노래는 워낙 대중들의 반향이 컸으므로 일본어로도 취입이 되었는데, 당시 일본의 여가수 도도로키 유키꼬가 남인수와 함께 불렀다. 제목은 [哀愁의 세레나데]였다.

그러니까 [애수의 소야곡]은 남인수의 출세작이라 할 수 있다. 가수로서의 맨 처음 데뷔 곡은 [눈물의 해협]이었고, 오케레코드로 옮겨온 뒤에는 [범벅 서울](朴英鎬 작사, 孫牧人 작곡)이라는 노래가 첫 데뷔 곡이었다. 이 노래는 1930년대 서울 장안의 대중적 풍경을 그린 것이다. 네온싸인, 룸바, 탱고, 재즈, 왈츠, 인조견, 랑데부 등 온통 서구 외래문화의 범람 속에서 당시 청춘 남녀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정황을 담고 있다.

[애수의 소야곡]의 前奏曲과 전체의 伴奏는 작곡가 박시춘이 직접 기타 연주를 적절히 활용하여 절묘한 효과를 이끌어 내었고, 이로부터 기타에 매료된 대중들이 늘어나서 한번 배워보겠다고 직접 찾아오는 사람들까지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박시춘 남인수 콤비는 일제강점기 한국가요사의 중심에 우뚝 자리한 兩大 山脈이 되었다.

이들 두 사람은 태평레코드의 李在鎬 白年雪 콤비와 멋진 맞수가 되었다. 당시 신문 보도를 보면 남인수에 대한 평판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 1938년 4월21일자 기사에는 [금년 22세, 오케에 입사한지 3년. [범벅 서울]이 처녀작이며 [물방아 사랑]으로 단연 유행가요계의 기린아가 된 일세의 행운아로서 바야흐로 도원경에 잠겨 있습니다]라고 적었다. 이후로 [꼬집힌 풋사랑] [감격시대] [낙화유수] 등 8백여 곡을 불렀고, 解放 후에는 [가거라 삼팔선] [달도 하나 해도 하나] 등 2백여 곡을 취입하였다. 늘 그 시대 감각에 맞는 노래를 불러서 가난하고 고달픈 서민 대중들의 기대와 호흡에 일치하였다.

남인수의 노래 중에서 우리의 心琴을 울리고 있는 絶唱이 어디 하나 둘 뿐일까만 그 중에서 단 몇 개를 선택하라 한다면 나는 단연코 [울며 헤진 부산항] [가거라 삼팔선]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을 추천하기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울며 헤진 부산항]은 1940년 1월에 新譜로 내놓은 노래인데, 당시 모든 사람들이 이 노래에 흠뻑 취했었지만 특히 挺身隊에 끌려가던 여성들, 徵用과 志願兵으로 고향을 떠나가던 청년들이 혼자 눈물을 흘리며 이 노래를 비감하게 불렀다고 한다.

남인수 성음의 특징과 창법의 장점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노래로서 가수 자신이 앙콜 요청을 받게 되면 반드시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가거라 삼팔선]은 해방 후에 발표된 남인수의 첫 곡이다. 分斷과 더불어 이 노래는 겨레의 가슴에 시퍼렇게 남아 있는 피멍처럼 처절한 감정을 불러 일으켜주기에 충분하였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1954년에 발매된 노래로써 피난지 수도였던 부산에서 서울로 되돌아오는 사람들의 감개에 젖은 정서를 노래한 내용이다. 한국전쟁과 1950년대 정서가 물씬 담겨 있는 이 노래는 남인수 가요의 최대 걸작 중의 하나이다. 필자 자신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남인수의 노래는 [고향의 그림자]와 [울리는 京釜線] 등이다.

찾아갈 곳은 못되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길래/ 수박등 흐려진 선창가 전봇대에 기대서서 울 적에/ 똑딱선 푸로페라 소리가 이 밤도 처량하게 들린다/ 물위의 복사꽃 그림자같이 내 고향 꿈은 어린다([고향의 그림자] 1절)

달려가는 철로 가에 오막살이 양지쪽에/ 소꿉장난 하다말고 흔들어주는 어린 손길이/ 눈에 삼삼 떠오를 때 내 가슴은 설레이어/ 손수건을 적시면서 울고 가는 대구정거장

전봇대가 하나 하나 지나가고 지나오고/ 고향 이별 부모 이별 한정이 없이 서러워져서/ 불빛 흐린 삼등 찻간 입김 서린 유리창에/ 고향 이름 적어보는 이별 슬픈 대전 정거장([울리는 경부선] 2-3절)

[고향의 그림자]의 특성은 1950년대의 그 어떤 시작품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서민 정서를 훌륭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오래도록 헤매고 있는 사람에게 이 노래는 왈칵 서러움과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요소가 있다.

시인 金南柱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 노래를 너무도 좋아하여 즐겨 불렀는데, 시인의 死後에 후배들이 술자리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시인을 추억하였다고 전한다.

[울리는 경부선]의 가사를 가만히 음미해보면 이도 또한 당시의 문학을 압도하고 있다. 문학이 해야할 일을 대중가요 가사가 대신하고 있을 때 당시의 문학은 實存主義라는 아득한 夢幻 속을 덧없이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노래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이십대 청년 시절, 나는 이 노래의 정서를 더욱 실감나게 느껴보기 위해 부산까지 일부러 경부선 완행열차를 타고 갔다가 돌아온 적이 있다.

여름날 저녁이었는데 열린 차창으론 낙동강 하구의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나는 열차 승강구 출입문에 매달려 끊임없이 경부선을 주제로 한 노래들을 골라서 부르고 또 불렀다. 그 날 선택된 노래들은 거의 대부분 남인수의 노래였다. 내가 부르는 노랫소리는 바람에 낱낱이 흩날렸다. 그것은 달리는 열차의 덜커덩거리는 소음과 합성이 되어 가슴속에서 묘한 슬픔을 불러 일으켰다.

1절에서 3절까지 몇 번을 반복해서 불렀던가. 결국 어느 험상궂은 얼굴의 질책에 의해 나의 노래는 중지가 되었고, 머쓱해진 얼굴로 나는 제 자리로 가서 마치 꾸중들은 아이처럼 다소곳이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남인수의 노래 중에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은 북한 땅에서 월남해 내려온 한 소년이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으로 고학 생활을 힘겹게 이끌고 가는 고달픈 생애를 노래한 작품이 있다.

<韓靑 빌딩 골목길 전봇대 옆에/ 나는야 구두닦이 소년입니다/ 나이는 열 네 살 내 고향은 황해도/ 피난 올 때 부모 잃은 신세이지만/ 구두 닦아 고학하는 소년이지요>

이 노랫말에 나오는 한청빌딩은 지금 사라지고 없지만 화신 부근으로 짐작된다. 해방 직후에는 朝鮮文學家同盟을 비롯한 左派 예술인들의 組織體가 주로 이곳 부근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여러 기록에 남아 있다.

남인수와 관련된 逸話는 너무도 많아서 이 제한된 지면에 모두 옮길 도리가 없다. 워낙 艶福이 많아서 <女인수>라 불리기도 했고, 理財에도 밝아서 <돈인수>라는 별명도 있었다고 한다.

1950년대 후반의 한창 전성기에는 서울 시내의 여러 극장들을 바쁘게 겹치기 출연을 하느라 직접 자전거를 타고 분주하게 다녔다고 한다. 조금 인기만 얻었다 하면 금방 외제 차를 구입하여 공연히 豪氣를 부리는 요즘 연예인들이 한번쯤 되새겨 볼만한 대목이다.

남인수는 말년에 폐결핵으로 몹시 고생하였으나 세상을 떠나기 석 달 전까지 병약한 몸을 이끌고 무대에 올랐을 정도로 가수로서의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였다. 1960년 4월혁명이 일어나자 독재정권의 총탄에 쓰러져간 어린 학생을 추모하는 노래를 취입하기도 했다.

1961년 그의 몸은 이미 질병에 의해 다시 일어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병중에도 불구하고 숨을 헐떡이며 남인수는 마이크 앞에 섰다. 노래 [무너진 사랑탑아]를 녹음하기 위해서였다. 몹시 어려운 과정을 거쳐 취입한 이 곡은 歌王 남인수의 마지막 히트곡이 되었다.

1962년 6월26일 불과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가요계 최초로 연예협회장이 엄수되었다. 이날 장례식장에는 남인수의 출세작인 [애수의 소야곡]이 장송곡 대신 은은히 연주되었는데 이 구슬픈 선율이 참석자의 슬픔을 더욱 돋구었다. 진주 남강 기슭에 그의 노래비가 있다는데, 이 글을 마치고 바로 그곳을 참배하러 떠나야겠다.                                                                                    

 

                                                                                                              (자료; 남인수팬클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