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한편으로는 실로 반 세기가 넘게 경과해 버린 1990년대 후반부터 소수의 특정 음반사들에 의해 SP음반(속칭 '유성기판') 수집과 원음의 복각(復刻)이 '불완전하게나마' 이루어진 것을 기폭제로 하여 제2세대 '올드 팬'을 비롯한 메니어(mania) 층이 두껍게 형성되면서 다시 각광과 주목을 받게 된다.
그는 타고난 미성에다 폭발하는 듯한 발성법, 듣는 이의 폐부를 찌르는 가창력으로 타의 추격을 불허함으로써, '가요 황제(歌謠皇帝)'라는 자연스런 애칭 외에, '가요계의 기린아(麒麟兒)', '불세출(不世出)의―100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가수(歌手)', '영원 불멸(永遠不滅)의 청년 가수(靑年歌手)', '만년 가수(萬年歌手)', '서정 가요(抒情歌謠)의 대부(代父)', '가수(歌手)의 상징(象徵)', '가요사(歌謠史)에 전무후무할 거성(巨星) 가수' 등의 전설적인 세평들과 더불어 '판소리 등 국악(國樂) 명창(名唱)들까지도 주눅들게 하는 목소리라는 이야기를 비롯해서, 특히 "일본 본토에서는 왜 이만한 가수가 나오지 않는지 통한할 노릇이다. 참으로 100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가수다."라고 한 '일본 엔카[演歌]의 대부(代父)'라는 고가 마사오(古賀政男, 1904-1978)의 자조 섞인 언급 등은 유명하다.
고음에서는 쇳소리가 울리듯 쟁쟁하고 카랑카랑하게 듣는이의 폐부를 파고드는가 하면, 저음에서는 속삭이듯 흐느끼듯 하면서 부드러움과 감미로움을 안겨 주는 매혹적인 미성, 폭발적이고 정열적이며 순발력이 뛰어난 창법, 무려 '세 옥타브(octave)'까지 거침없이 넘나드는 자유자재한 발성 능력, 정확한 가사 전달력(발음) 등은 거의 완벽성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될뿐더러, 절망과 실의에 빠졌거나 현실 생활에 지친 민중에게는 활력을 실어 주는 마력을 발휘함으로써, 질곡의 시대 일제 강점기부터 그의 인기는 거의 '절대적'이었다는 말로 흔히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사후에는 자연히 그의 노래를 모창(模唱)하는 후배 가수(들, 이를테면 남강수(南江樹)―1950년대 말에 미도파레코드사('지구레코드'의 前身)에서 '추억의 소야곡' 재취입(모창)을 위해 기용한 가수로서 초기에는 '이청봉(李淸峰)'으로 음반 레이블에 자세한 배경과 함께 기재되었던 가수―를 비롯해서, 김광남(金光男), 고대원(高大遠) 등이 대거 등장하여 '모창 음반'을 끊임없이 내놓음으로써 대중의 귀를 현혹시키는가 하면,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음반사를 가리지 않으며 '남인수'라는 이름을 내걸고 음반에 그 목소리가 실린 무명의 모창 가수(模唱歌手)도 일일이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방송극(방송 드라마)이나 영화, 심지어 '…기록', '…실록' 하는 것들을 포함한 '다큐멘터리' 등에 삽입되는 노래는 물론, 스테레오 시스템이 일반적 추세로 자리잡는 70∼80년대에는 거의 모든 방송에서 "남인수"의 이름을 빌린 정체 모를 목소리들이, 늘어지고 쳐진 목소리와 창법에 실려서 "남인수 노래(목소리)"로 둔갑한 채 판을 쳤거니와, 젊은 방송 제작자나 진행자 들은 이를 모른 채 "남인수 선생의 노래"라고 소개하면서 방송 전파에 싣는 진풍경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첨언해서 두말할 것도 없이, '남인수 모창 음반', 즉 '가짜 남인수 음반'은, 말하자면, 오늘날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익명의 모창 가수를 이용한 음반 제작·발매 등의 원' 격이 되고 있기도 하다.
사후인 1960년대 초반부터, 각각의 음반사들끼리 그의 최종 취입곡임을 내세우며 경쟁적으로 대표 타이틀에 올린 노래들이 출반되기 시작했는데, 그 곡목들로는, '4·19' 의거(義擧)에 목숨 바친 어린 학생들의 넋을 기린 '사월(四月)의 깃발'(미도파레코드 출반)을 비롯하여, '눈 감아 드리오리'와 '불효자(不孝子)는 떠납니다'(이상 아세아레코드사 출반), '한 많은 네 청춘'(프린스레코드사 출반), '고향등(故鄕燈)'(LKL레코드사 출반), '꽃 피는 청춘 마을'(오스카레코드사 출반) 등이 있거니와, 물론 어느것이 그의 최후 취입곡인가를 확실하게 판단활 수 있는 자료는 현재로서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사후 한 동안은, 그를 기리는 추모의 열기가 고조되어, 1960년대 중반부터, '선창(船艙)' 등을 부른 고운봉(高雲峰), '울고 넘는 박달재' 등을 부른 박재홍(朴載弘) 등 후배 인기 가수들에 의해 가요계 최초로 '남인수 노래비' 건립안이 제기되고, 1968년에는 '남양흥업'이란 영화사에 의해 분단 상황에서 이산의 고통과 고독의 모진 세파를 헤쳐 오며 노래 인생을 함께하던 이난영(李蘭影)과의 아픈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강산 낙화유수'(감독 조길현, 극본 이두현, 제작 이지룡, 김진규·문정숙·김성호 등 출연)라는 영화가 제작, 개봉되기도 했으며,
당시 한창 인기를 끌던 여성 듀엣 '은방울자매'는 '진주의 눈물'(야인초 작사, 남기남 작곡)이란 노래을 불러 그를 기리기도 했다. 1981년에는 생전부터 그를 흠모하는 가수 신해성(申海成)의 주도로 '예도 매미회'('남인수 기념 사업회'의 전신)가 결성되면서 '남인수 노래비' 건립 사업에 가속도가 붙어 마침내 1987년 4월 5일에는 '애수(哀愁)의 소야곡(小夜曲)' 노래비가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밤나무골 유원지에 건립되었다(1998년에는 제 8회 '남인수 가요제'를 계기로 하여 '서울 드림랜드'로 이전, 현재에 이름).
이보다 앞서(1980), 가수 신해성은 '아, 그 이름 남인수'(신해성 작사 , 박남춘 작곡)라는 노래를 취입하여 그를 기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으며, 그의 주도로 1991년(6. 26)부터는 해마다 '남인수 가요제'가 개최되고 있다.
그러나, 가장 획기적인 일은, 2000년(9월)의 '남인수 팬클럽'(현재 회원 수 400여 명) 결성 초기부터 '남인수 전집'(제1차분, CD 8 장 및 172 쪽 분량의 책자 1 권)을 발간, 그가 취입해 남긴 가요 가운데, 우선 227 곡을 발굴, 정리하였다는 점이며, 2001년(6. 26)에는 세계적으로도 아직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대중 가수로서도 처음인, 한 독지가에 의한 '남인수(南仁樹) 동상(銅像)'의 건립―'진양호'(진주 남강 댐) 호반―이라 할 것이다.
그의 유적지로는 생가(진주시 하촌동 195번지 소재)가 아직 남아 있으며(문화재청(文化財廳)에 의한 '근대 문화 유산' 등록, '문화재 153호' 지정 고시<2005년 4월 15일자>), 강씨 문중 소유의 한 산(山)에 묘소(진주시 장재동 산 49번지 소재)가 있다(2004년 4월, '남인수 팬클럽'에 의한 묘소 정화와 추모비 건립 작업 완료).
≪ 참고 자료(연대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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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總督府時局對策調査會 會議錄諮問答申書(民俗苑 影印本, 昭和十三年)
一線記者의 告白(新聞記者手帖 姉妹篇, 모던出版社, 檀紀四二八二年)
最新流行歌謠集[附 군가·잡가](문성당서점, 4284(1951))
最新傑作流行歌集(裵誠道, 版權所有 太陽堂書店, 大邱府, 1947.9)
新聞記者가 엮은 解放十年史(金剛文化硏究社, 檀紀四二八九年)
韓國演藝大鑑(成榮文化社, 1962)
大抒情 韓國레코오드歌謠史―解說書―(姜史浪 編著, 韓國各레코오드會社合同製作社團法人音盤製作家後援, 1967)
大東亞戰爭秘史(朝日新聞從軍記者團, 노벨文化社, 1971)
靑春挽章―太平洋戰爭에 끌려갔던 學兵手記集―(1·20同志會 編, 1972)
남기고 싶은 이야기 (中央日報社, 1973)
放送禁止歌謠曲目一覽(韓國放送倫理委員會編, 1976)
放送禁止歌謠曲目一覽(放送審議委員會, 발행 연도 미상)
韓國放送史(非賣品)(韓國放送公社, 1977)
言論秘話(50篇)-元老記者들의 直筆手記-(韓國新聞硏究所, 1978)
韓國人名大事典(新丘文化社, 1980)
朝鮮民衆의 中日戰爭觀―'流言蜚語'를 中心으로―(宮田節子, 청아신서, 1985)
불멸의『애가』반야월 명작 가요 전집―고희 기념―(반야월, 후반기출판사, 1986)
日本帝國主義의 朝鮮支配(청아신서 19, 朴慶植 著, 청아출판사, 1986)
(그 노래 그 사연) 歌謠夜話(반야월 지음, 세광음악출판사, 1987)
韓國放送六十年史(韓國放送公社, 한국방송사업단, 1987)
풀려난 공연·방송 금지 가요(부록 '금지곡과 해금곡 총목록', 세광음악출판사, 1987)
日帝末期 파시즘과 韓國社會(청아신서, 최원규 엮음, 청아출판사, 1988)
大韓民國建國靑年運動史(建國靑年運動協議會總支部, 1989)
유성기 음반 가사집Ⅰ·Ⅱ·Ⅲ·Ⅳ·Ⅴ·Ⅵ(한국고음반연구회, 民俗苑, 1990∼)
손목인의 인생 찬가 '못다 부른 타향살이'(손목인 씀, 도서출판HOTWIND, 1991)
어느 광대의 사랑―김희갑 자전 회고록―(金喜甲, 삼진기획, 1992)
유성기로 듣던 가요사 첫째(一九二五∼一九四五)·둘째(1945∼1960)(신나라레코드, 1992·2000)
유성기로 듣던 不滅의 名歌手(신나라레코드, 연대 미표기)
한국 가요사(박찬호, 현암사, 1992)
湧金屋時代―詩人 李容相의 酒興半世紀―(李容相, 서울신문社, 1993)
한국사 1∼27(한길사, 1994)
한국 유성기 음반 총목록(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民俗苑, 1998)
留聲器音盤總覽資料集1907▷1943(金占道 編著, 신나라뮤직, 2000)
애수의 소야곡[박시춘 명작집](김점도 편, 삼호출판사, 2000)
남인수 전집(南仁樹全集, 남인수팬클럽 편, 2001)
음악 교육의 지역화에 관한 연구(조성환, 2002)
http://www.gayo114.com(가요사 관계 연재물<이근태, 이준희 등 집필> 등)
남인수팬클럽회보 제1∼18집(남인수팬클럽, 2002. 9.∼2005. 1)
각종 신문(1930∼50년대의 朝鮮·東亞日報 및 1930∼40년대의 京城日報, 1940년대의 每日申報 등)
각종 신문·잡지 연재물과 기획 기사 및 방송을 비롯한 각종 다큐멘터리 및 여타 기록물들.
녹음 자료(① "故南仁樹 장례식에 참석하고"<작곡가 李龍俊> ② '남인수 라이브'(부산 국제극장 무대, 1959. 12.) 등.
기타 집필자(執筆者) 사유(私有) 자료(가요 관계 필사본, 'SP·LP' 음반 자료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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