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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설지선-가황자료실/남인수★가요일생

庶民의 아픔을 달래주던 국민가수/ 이근태(팬클럽 고문)

설지선 2008. 1. 29. 05:35
[스크랩] 庶民의 아픔을 달래주던 국민가수/ 이근태(가요114기획위원,가요사 연구가) 2006/06/22

서민의 아픔을 달래주던 국민가수
 

우리 가요계 사상 최고의 미성가수였던 남인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반영하듯 성이 다른 이름만 셋이다. 최씨 문중에서 태어나 최창수, 강씨 문중의 대를 잇기 위해 양자로 들어가 강문수, 온 국민의 사랑을 받은 예명 남인수. 가수이외의 삶은 진주가 고향이고, 봉래보통학교 출신이라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 온통 베일에 가려 있다.

 

저음과 고음을 넘나드는 3옥타브의 음역을 소유한 목소리는 "백년이 지나도 나올 수 없는. 하늘이 내린 목소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또한 반듯한 매너, 술, 담배를 멀리하는 자기 절제가 몸에 밴 생활 태도는 뭇 가수들의 모범이 됐다. 그래서 그는 후배들로부터 진정한 '서정가요의 황제'로 추앙받고 있다.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 그가 남긴 주옥같은 1,000여 곡들은 때론 나라 잃은 망국민의 처참한 마음을, 때론 아물지 않는 전쟁과 분단의 고통 속에 신음한 서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진 국민가요들이다.

 

1935년 어느날, 학생복 차림의 잘생긴 18세 청년 강문수는 '시에론레코드'사 음악실에서 노래 테스트를 받는다. 이때 부른 노래가 <눈물의 해협>. 기타 반주를 해주었던 작곡가 박시춘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고 방송 출연과 본격적인 가수 수업을 받게 된다.

 

<눈물의 해협,chieron 2003번>은 1936년 7월에 발매된 데뷔 SP음반. 시에론레코드 시절 강문수의 장래성을 발견한 작사가 강사랑은 그를 메이저 레코드사인 오케이레코드로 스카우트한다. 남인수란 예명은 오케이레코드가 <범벅서울, okeh1934. 1936년10월>을 내면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은 <눈물의 해협> 멜로디에 이부풍의 신작 가사를 붙여 발표한 곡이다. <애수의 소야곡, okeh12080. 1937년12월> SP음반의 발표는 그에겐 인기 정상으로 향한 힘찬 첫 발자국. 이 음반을 주문하려는 전국의 레코드 소매상들이 서울로 구름같이 몰려들었을 정도였다.

일본 오사카 고라이레코드사의 <강문수-눈물의 해협. korai1061> 음반도 흥미거리. 하나의 멜로디(곡)를 한 가수가 두 가지의 제목과 가사로 불러 동시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는 것은 사상 유례없는 기록이 아닐까?

 

시련도 있었다. 친일가요라고 비난받은 수많은 곡중 <감격시대, 1939년4월, okeh12237번>와 <혈서지원-이천오백만감격, 1943년11월, okeh31193>은 그가 부른 군국가요. 얼마 전 8ㆍ15 광복절 행사에 <감격시대>가 흘러나와 언론기관에 항의전화가 빗발친 것도 이 때문이다.

감격시대의 발표 연도를 제대로 알리 없는 방송 관계자들의 무지에서 나온 해프닝이지만, 암울했던 일제치하에서 강요당했을 군국가요의 존재는 후세들에게 나라 잃은 설움의 아픔을 전해주는 뼈아픈 교훈이다.

 

당시 남인수의 인기는 지금의 '오빠부대'를 능가했다. 그가 출연한 악극단은 벌떼처럼 몰려든 청중들의 거듭된 '앵콜' 요청으로 진행이 어려웠을 정도. '사회자들은 번번이 무릎을 꿇고 프로그램 진행을 사정해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청중들의 탄성과 흐느끼는 여성 관객들로 객석은 늘 술렁이고 극장 밖에는 남인수를 데려가려는 인력거꾼들이 서로 다툼까지 벌였다.

 

그러나 인기상종가는 그만한 대가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되던 해(1945년) 남인수는 결핵으로 병약해졌다.

민족분단의 상징인 38선이 굳어져가던 46년, 건강이 다소 회복되어 발표한 <가거라 38선>은 해방후 첫 취입곡. 박시춘이 운영하던 은방울쇼단을 맡으며 치밀한 계산, 과감한 투자로 '돈인수'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성공한다.

 

53년 7월 휴전후 발표한 또하나의 명곡은 <이별의 부산정거장, 유니버샬, 1954년>이다.

55년 추억의 소야곡, 청춘고백, 56년 산유화, 58년 무너진 사랑탑 등으로 히트 퍼레이드가 계속됐다. 마지막 취입곡은 60년 '4ㆍ19학생의거의 노래'였다.

62년(45세) 지병의 악화로 남인수는 세상을 떠난다. 조계사에서 한국연예인협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의 장송곡은 온 국민이 사랑했던 '애수의 소야곡'이였다.

 

남인수도 배호처럼 사후에 우후죽순격으로 탄생한 모창가수들로 인해 가짜음반이 난무한다.

SP음반들과 50~60년대 초반의 10인치 오리지널LP와는 달리 70년대이후의 대부분 LP는 남강수, 김광남 등의 모창가수 음반들이다. 그가 활약하던 시절은 반주 자체가 촌스러울 정도로 단순했는데, 가짜 음반들은 세련미가 넘치지만 맛깔이 떨어지는 치명적 한계를 갖고 있다.

 

남인수를 기리는 모든 일에 정성을 들이며 '예도매미회' 모임을 결성하고, 노래비 건립에다, 1991년부터 10회째 남인수가요제를 이끌어온 신해성과 그 애호가들.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남인수 사망 39주기인 6월26일 진주에서는 남인수동상제막식과 11회 가요제가 축제형식으로 치러진다. 팬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반가운 미담이다.

 

 

가요황제 남인수

 

 

타고난 미성의 목소리 주인공 남인수는 감정표현이 풍부하고 음역이 넓으면서 가사발음도 정확하여 모든 음악을 소화시키는 천부적인 재질의 가수로서 일세기에 한번 나올 정도의 가수로서 풍류의 고장 진주에서 태어났다.

성악가가 꿈이었다는 남인수는 1950년 대극장 무대에서 앵콜곡으로 현제명 작곡"희망의 나라"를 곧잘 불렀다.

가수가 되기 위하여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서 찾은 곳은 시에론 레코드였다. 채규엽, 강홍식, 김용환, 고복수가 명성을 떨치던 콜럼비아 레코드, 포리돌 레코드, 빅터 레코드, OK 레코드 등에는 무명의 청년이 무작정 문을 두들기는 것도 쉽지않아 뚜렷한 간판스타 가수가 없는 시에론 레코드에 찾아갔었다. 시에론 레코드에서 작곡가 박시춘과의 최초로 만난 것이 작곡가와 가수의 명콤비가 되는 운명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도 시에론 레코드에 들어간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어느날 검은 무명학생복에 게다(나막신류의 일본신발)를 신은 총각녀석이 찾아왔어요, 하이칼라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왔더군요. 충무로 아서원앞 3층 건물에서 테스트를 해보니 고음 저음처리를 잘했어요"<생전 박시춘 증언>

18세의 남인수는 작곡가 박시춘에게 곡을 받아 김상화 작사의 눈물의 해협을 취입하였다.

 

" 현해탄 푸른물에 밤이 내리면 임 잃고 고향 잃고 우는 저배야--"

 

현해탄의 관부 연락선에서 피고지는 애틋한 사연을 품은 내용의 노래였다. 남인수의 본명인 강문수라는 이름으로 1936년에 <눈물의 해협>이 발표되었지만 신통한 반응을 얻지 못하자 박시춘은 악극단연주자로 지방으로 떠나버리고 가수 강문수라는 이름도 파묻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금년(2000년) 8월에 발간된 유성기 음반 총람(신나라 레코드)에는 남인수와 이난영이 1935년 12월 김해송곡으로 <흘러온 남매> 취입이 뉴코리아 레코드로 기록되어있다. 뉴코리아 레코드는 순수한 한국인의 자본으로 1935년 일본 동경에 설립된 회사로서 김정구, 이화자가 데뷔한 기록이 남아있다. 근거있는 기록인지 오류에 의한 기록인지는 연구의 과제가 될 수도 있다. 8.15해방 이후의 음반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1948년 이후 1950년 중반까지의 레코드생산은 일제시대에 나온 음반 위에 다시 입히는 형태의 열악한 가내수공업식으로 빅터 레코드, 코로나 레코드, 흥아 레코드, 코리아 레코드 등 우후죽순으로 나타났다가 명멸한 시기로 음반녹음은 일본에 가서 레코딩한 경우도 있었다.

 

18세의 무명가수 강문수의 장래성을 감지한 OK 레코드에서는 남인수라는 예명으로 전속가수로 대우하여 1936년 10월에 <범벅서울>,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 두곡을 OK 레코드 데뷔곡으로 선보이면서 1937년 3월에 작곡가 박시춘과 다시 만나게 되어 <물방아 사랑>을 발표하였다.
<물방아 사랑>이 좋은 반응을 얻어 가수로서 남인수가 인정을 받으면서 1937년 12월에 신년정월신보로 <애수의 소야곡>이 발표되었고 1938년 대힛트하여 남인수의 전성시대가 시작되었다.

 

 

1938년 9월에 코라이 레코드에서 <눈물의 해협> 음반광고 선전에 강문수 노래로 나왔는데 시에론 레코드에서 나온 <눈물의 해협>이 어떤 경로로 "코라이 레코드"에서 재발매되었는지 알수가 없지만 이노래가 대힛트한 일면을 엿볼수가 있다.
하나의 노래가 3개 레코드사에서 나오고, 한가수가 두 이름으로 또한 가사내용을 다르게 만든 것은 가요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눈물의 해협>이 처음에 힛트되지 못한 이유로는 시에론 레코드의 유통망 미약과 음반사의 음반음질차이도 있으며 연예계의 징크스로 노래제목, 가수의 예명에 의한 영향일수도 있다.

가요계의 기린아가 된 남인수의 인기는 극장 공연 때에 권번 기생들이 보낸 인력거가 즐비하게 극장 앞에 진을 칠 정도였다. 공연이 끝날 때쯤에는 인력거꾼들이 남인수 모시기 쟁탈전을 벌여서 남인수를 권번요정으로 데리고 가면 기생이 버선발로 달려 나와 칙사대접으로 환대하였다.
전국의 어느 기생이 남인수의 애인인가가 화제가 되기까지 하였다.

 

가요의 황제로 군림하던 남인수는 1943년부터 병마의 침입으로 시달리게 되는데 8.15 해방직전 OK레코드의 "OK싱깅팀"이 평양 제일의 극장 "금천대좌"에서 악극 춘향전을 공연할때였다.
이도령역의 남인수가 어사출두 장면에 달려 나오다가 퍽 쓰러졌다. 관중들은 그것이 연기인줄 알았다. 남인수의 입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결국은 난리와 아우성속에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남인수는 악화된 폐병 속에서도 약을 먹으면서 관중들의 환호 속에 대공연을 계속하였다.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돈 관리에 인색하여 별명이 돈인수라고 불린 것도 이때였다. 남인수의 극단 전속료는 5000원, 월급이 100원으로 당시 고급회사원의 월급은 40원이었다.

가요사에서 최장수 인기를 누리고 최고의 힛트곡을 낸 남인수의 무수한 노래중 대표적인 몇곡을 보면
<물방아 사랑>(1937년 박영호 작사, 박시춘 작곡),
<인생극장>(1937년 박영호 작사, 문호월 작곡),
<애수의 소야곡>(1937년 박노홍 작사, 박시춘 작곡),
<꼬집힌 풋사랑>(1938년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감격시대>(1939년 강해인 작사, 박시춘 작곡),
<울며 헤진 부산항>(1939년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눈오는 네온가>(1940년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남매>(1942년 조명암 작사, 이봉룡 작곡),
<서귀포 칠십리>(1943년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였다.

8.15 해방이 되자 가요계는 불황에 빠지게 되었다. 국내에서 음반을 가공 생산하는 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8.15 해방 이전에 나온 음반에 다시 레코딩하는 가내수공업 형태로 하루에 기십장 음반을 생산하였다.
열악한 실정에서 나온 남인수의 노래가 <가거라 삼팔선>, <달도 하나 해도 하나>로 8.15 해방과 함께 생겨난 남북분단을 노래한 곡들이었다.

음반생산의 부진으로 악극단의 활동이 활발하여 가수들은 여러 악극단으로 흩어졌는데 남인수는 1946년 2월 제일극장에서 공연된 "봄을 기다리는 사람"에 출연하여 인기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손목인 악단의 연주로 박향림, 최남용 가수와 인기배우 이몽녀, 박광옥등이 출연을 같이 하였다. 9월 단성사에서 CMC(손목인 악극단)공연에는 가수로 이은파, 김선영, 나성려, 코메디안 이복본, 인기무희 홍청자, 배우 김연실과 출연하고 10월에는 수도극장에서 가수 황금심, 송달협, 최병호, 백난아, 배우 왕숙랑, 코메디안 이종철과 그랜드쇼에 출연하여 화려한 무대를 장식하였다. 

 

1950년에는 작곡가 박시춘이 설립한 "제 7천국" 쇼단을 인수하여 가수, 무희, 코메디언들을 모아서 국도극장에서 창립공연을 한 직후 6.25동란으로 해산이 되자 국방부정훈국 선전과 소속의 문예중대에서 전후방을 연결하는 위문공연에 참가하였다.

1953년 7월 휴전이 되자 서울에 온 남인수는 <고향은 내사랑>을 취입하면서 연이어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노래하였다.
전쟁속에서 피난살이를 사던 사람들에게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절망 속에서도 위안을 주던 노래로서 1954년 이 노래가 전국을 휩쓸다시피 하였다.

 

1955년에는 <추억의 소야곡>이 계속 힛트 하면서 환도한 남인수는 극장무대에서 계속 인기를 누렸는데 자전거를 타고 이 극장 저 극장으로 겹치기 출연을 하였다. 폐허의 거리인 서울시민의 유일한 안식처로는 극장뿐이어서 서대문에 있는 동양극장에서 돈암동의 동도극장까지 자전거로 이동하면서 출연하였다.

 

1956년 반야월 작사, 박시춘 작곡 <나는 사람이 아니외다> 노래는 금지곡 아닌 금지곡으로 된 사연이 각별하다. 음반 판매업소에서 문둥이 노래라 재수가 없으며 노래가 너무 처절하여 가사를 바꾸지 않으면 판매를 하지 않겠다는 소동이 일어나서 <님의 통곡>으로 가사를 바꾸어서 다시 취입하였다.

1950년대까지도 문둥병(나병) 환자가 많았는데 특히 영남일대에 많아서 하천에서 움막을 치며 유리걸식하였다. 이때에 손가락이 문들어지고 눈썹까지 다빠진 삼십대의 문학청년(한하운)이 방황, 울분, 비통함을 시로 발표하여 문둥이 시인으로 화제의 대상이 되자 작사가 반야월이 비통한 나환자의 심정을 작사한 것이다.

 

1959년부터는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활동이 힘들게 되면서 OK레코드 시절의 가수 이난영이 동료애로서 남인수에게 각별한 간호를 도맡았다.

7남매를 키울때에 남인수의 도움을 받아온 이난영은 딸 김시스터스가 미국으로 떠나자 더욱 고독감에 빠져 있던 중으로 동료애가 애정으로 발전하게 되어 남인수가 눈을 감을 때에는 남인수가 좋아하는 <황성옛터>를 병석의 머리맡에서 이난영이 눈물로서 노래하였다.

 

남인수가 세상을 떠나기 몇 개월전에 나온 <눈감아 드리우리> 노래는 반야월 작사,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 작곡으로 의자에 앉아서 취입하였다.

1962년 6월 남인수의 장례식은 연예협회주관으로 안국동 조계사에 참석한 모든 여자가수는 흰소복 차림으로 남자가수들은 검은 정장차림으로 <애수의 소야곡> 음악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가요의 황제 남인수를 떠나 보내었다.

 

남인수를 기리고 추모하는 <예도회>가 가수 신해성에 의하여 결성되어 1987년 경기도 양주군 일영리 밤나무골 서북쪽에 남인수 노래비를 건립하였다.
진주 진양호 선착장부근에도 남인수 노래비가 건립되어 남인수 가요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이 근 태 (가요114 기획위원, 가요사 연구가)

출처 : 추억의 음악감상실 가요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