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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설지선-가황자료실/남인수★가요일생

불세출의 가요황제 남인수/ 라인강(남인수팬클럽 고문)

설지선 2008. 1. 29. 06:06
불세출의 가요황제 남인수/ 라인강(남인수팬클럽 고문) 2006/06/22

 

1.가요황제 남인수

한국 가요가 낳은 최고의 영웅은 두말할 바 없이 바로 남인수다. 뛰어난 미성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겪어내며, 피폐해진 민족의 심성을 달래준 그 가장 최전선의 가수가 남인수임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리라. 그리하여 오늘날 그는'가요황제' 로 불리는 유일한 가수가 되었다.

시대는 영웅을 필요로 한다. 민족의 애환을 가장 가까이서 달래주는 가요는 그런 면으로 많은 영웅을 탄생시켰다. 무너진 황성(荒城)의 슬픈 감회에 눈물짓는 조선의 세레나데 <황성옛터>를 부른 '이애리수' 에서부터, 민족의 가슴에 슬픈 감성의 벨을 짜릿하게 누르는 원형질의 노래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 , 압제의 현실을 절정의 상징으로 직조(織造)한 <눈물 젖은 두만강>의 '김정구' , 암흑같은 시대를 정처 없는 유랑의 애잔한 아픔 속에 풀어낸 <나그네 설움>의 '백년설' 등은 그런 면으로 영웅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노래는 당대 국민들의 억압받는 삶을 근원에서 위로하고, 그리하여 희망의 형이상학을 시대에 선명하게 새겼다.

하지만 그 영웅들은 거기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개인적인 절절함은 있었지만, 우리 국민의 본원적 감성의 기제(機制)를 때리는 노래들을 더 이상 시대에 아로새기지 못했다. 그들은 단역(端役)과 각주(脚註)로 채워진 단회적인 영웅이었을뿐이다.

그에 비하면 남인수는 시대 전체를 관통한 진정한 영웅이었다. 세기말적인 절망을 섬세하게 풀어내 오늘날 태양처럼 신화가 된 명곡 <애수의 소야곡>을 비롯 <가거라 삼팔선>, <낙화유수>, <무너진 사랑탑>, <산유화>, <이별의 부산정거장>, <추억의 소야곡> 등등 현란한 빛을 발하는 주옥같은 무수한 노래들을 민족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화인(火印)처럼 희망봉으로 새겼다. 오늘날 한국 사람으로서 그의 노래들을 듣거나 부르며 자라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는 한국 가요의 불가사의한 존재일 뿐 아니라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인수는 오늘에 점점 잊혀져가고 있다. 아니 남인수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 가요 전체가 더 이상 예전처럼 감성의 화살을 쏘아대지 못한다. 당대의 쓰린 속을 아우르던 절절한 감성은 지금에 와서 낯선 거리를 배회하는 유령이 되어 생경한 역사 속으로 갇혀 버렸다. 그들이 그 값으로 터전하던 유랑(流浪)과 회한(悔恨)과 피폐(疲弊)의 시대는 지난 것이다. 60년대부터 득세한 서구적 감성과 도회적 세련, 귀를 찢는 빠른 리듬과 요설처럼 쏟아지는 언어, 한바탕 펼쳐지는 현란한 율동이라는 외연(外延)의 소나기 속에서 당대의 희로애락은 화석화되어 역사의 지층 속으로 급속히 매몰되어 버린 것이다. 가요는 박물관에 미이라로 전시되어 버렸다.

한국 가요는 그 수명이 다했는가? 지난날처럼 문화라는 동력을 퍼올리던 가요적 감성은 시효가 지났는가? 아니, 시대를 관통하는 영웅은 사라졌는가?

그렇다. 우리는 역사를 너무나 쉽게 내던져버린다. 엊그제까지 우리들의 영원한 양식(樣式)들을 헌신짝처럼 외면하고 새롭고 신기한 문화의 바다로 풍덩 빠져버린다. 게다가 저 찬란한 불멸의 가요들로 아픈 가슴을 달랬으면서도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재해석한 논문 하나 미처 남겨두지 못했다. 가요뿐만일까. <아리랑>이나 <임자없는 나룻배>같은 민족의 영화들도 사라져버렸음에야. 부서진 문화재의 파편들을 보물처럼 박물관에 보존할 때 어느 누가 우리 문화의 주옥편들을 보존하고 되살리려고 했던가? 논문 한 편 없다는 것은 우리 가요의 치욕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무수한 노래들은 신음처럼 지하실을 떠돈다. 지금에야 이미 늦지 않았는가?

아니다. 하여 지금이라도 잃어버린 노래들을 되살리고, 그 노래가 가지는 역사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필요하면 삶의 지혜로 삼아야 할 것이다. 특히 남인수라는 거대한 스펙트럼이 반사하는 정교한 의미들을 건져서 이 시대 거칠고 부박(浮薄)한 정신들에 전설과 신화의 의미를 부여하고, 두터운 인간 정신을 북돋아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가 정말로 되살려야 할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남인수라는 존재가 표상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노래들은 어떤 가치를 획득하고 있는가? 이 시대에 그는 아직도 그의 몫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아니 흘러간 시간의 낡은 이미지로 둘둘 말아 역사의 창고 속으로 내던져야 옳지 않은가?

정당하지 못하다. 그는 역사의 자리로 진작 떠났지만, 그러나 그가 남긴 신화들은 아직도 신비한 빛을 잃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30대 이상에게서는 살아 있는 전설이며, 40대 이상의 올드 타이머에게는 肉化된 콘덴츠로 새겨져 있다. 팝 음악계에 비틀즈가 전설로 살아있듯이 우리에게는 남인수라는 레코드가 시퍼렇게 살아 있다.

2. 남인수, 그의 신화(神話)

분명 그는 오늘에도 살아있다. 무대 위에서 그는 아직도 노래를 부르고 있다. 흰 플란넬 양복에 보타이를 매고 극장 천정이 무너져내리듯 쩌렁쩌렁한 소리를 내뿜고 있다. 얼마나 생생한 소리며, 모습인가! 그의 노래를 불러 보라. 꿈에서도 따라 부를 정도로 익숙한 노래가 아닌가? 그는 영원한 헌역으로 우리 가슴에 새겨졌다. 무엇이 40여 년 전에 떠난 그를 아직도 현재형으로 착각하게 하는 것일까? 까마득한 후배들도 벌써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랜데 말이다.

아마도 그는 우리가 잃어버린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향수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현대라는 시대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메마른 허망을 위로할 수 있는 안온한고향의 모습으로 그는 존재한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눈물 같은 평안을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은 거의 절대적인 가치로 들어앉는다. 그만큼 그가 가지는 몫은 진정(眞情)으로 다가온다.

남인수가 가지고 있는 이런 근원적인 몫을 정확히 집어내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그는 현대에 신화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 신화를 걷어낸 뒤쪽에서 일제라는 정치학적 측면으로 접근해야 할 부분이 있는가 하면 당대 민중의 정신적 측면을 고려해야 하고, 무엇보다 오늘에도 되살아날 수밖에 없는 본원적 모습 등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런 다양한 관점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런 부분들을 제대로 학문적 성과로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아마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연구하여 올바른 작가론, 또는 가요 작품론 등이 활발히 개진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간단하나마 우선 드러나는 몇 가지 그의 몫들을 중심으로 왜 그가 아직도 우리 곁에서 현재형으로 존재하는가, 우리는 그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등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그의 성음(聲音)-

그는 가요뿐만 아니라 음악의 전 영역을 통털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잡티 하나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소리를 가지고 있다. 일체의 잡음이 배제된 단일한 대역(帶域)에서 순수한 소리를 뿜어내는 그의 미성은 저음과 고음을 넘나드는 자유를 맘껏 발산하고 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자신감으로 충만한 여유와 생에 대한 진정으로 몸을 떨게 되는데 아마도 3옥타브를 넘나드는 음역에서 뿜어내는 자유로운 성음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의 성음과 관련하여 풍부한 성량을 자랑하는 정통 성악가들도 그와 함께 무대에 서길 꺼려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자존심 강한 그들에게도 그의 폭넓은 음역과 미성은 그야말로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점은 명창(名唱)들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박동진은 남인수가 관객의 열광적인 박수를 받으면서 화려하게 무대를 휘어잡을 때 객석에서 자신의 초라함을 곱씹고 있었다고 말했다. 오늘날 위대한 명창들도 그 앞에서는 얼마나 주눅이 들었던가.

병신춤의 대가인 공옥진은 그런 그를 짝사랑하여 무대 아래서 노래를 들으면서 뛰는 가슴을 달래다가 그가 객혈하고 여관방에 누웠을 때 몰래 방으로 들어가 정성껏 간호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성음은 한 처녀의 일생을 바뀌게 할 정도였다. 가요작가 진방남이 노래를 가장 잘 소화하는 가수로 그를 꼽고 <백년이 지나도 나올수 없는, 하늘이 내린 목소리>라고 평한 가장 핵심적 이유가 바로 이런 그의 성음에 있다. 그야말로 불세출(不世出)의 가수로서 다른 가수들과 현격히 격(格)을 달리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둘째, 달리 예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취입곡-

그는 해방 전 800여 곡, 후 200여 곡, 도합 1,000여 곡을 취입했다고 한다. 이것은 30년이 채 안되는 기간으로 보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부풀린 면이 있다 하더라도 일년에 거의 30여 곡의 노래를 취입했다는 말이 되는데 과연 우리 가요에서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해방과 전쟁 후도 그랬지만 일제 시대는 레코드 회사 자체도 적었고 그나마 빈약하고 낡은 기자재로 국내에서는 제대로 판을 찍어낼 수도 없었다. 보통 인기 있는 전속 가수들을 일본에 데리고 가서 녹음해오곤 했는데 그것도 태평양전쟁 이전 7∼8년 남짓한 기간에 그 많은 노래들을 취입했다는 것은 그의 특별한 위치를짐작케 한다. 당대를 주름잡던 손목인, 김해송, 박시춘, 이재호 등은 말할 것도 없고, 후대의 백영호, 손석우, 나화랑 등이 자기들의 노래를 그가 불러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했다는 것은 그의 뛰어난 자질과 인기를 짐작케 하기에 충분하다.

어느 누가 그렇게 많은 노래들을 남길 수 있었을까? 단언하지만 남인수가 아니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며, 당연히 남들은 감히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히트곡을 양산했다. 그래서 그가 남긴 주옥같은 노래들은 나라 잃은 망국민의 처참한 마음을, 때론 아물지 않는 전쟁과 분단의 고통 속에 신음한 서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준 국민가요(國民歌謠)였다.

셋째, 다양한 주제(主劑)와 시대적 감각(感覺)-

오늘날 전반적으로 가수들의 재질이 떨어지고, 가수 생명 자체도 짧아지는 세태에서는 한 가수가 자기의 세계를 완성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가요에서 자기 세계를 체계적으로 완성하고 문화의 코드로 확립한 사람은 남인수가 거의 유일하다. 물론 백년설의 <유랑과 허무의 자연주의적(自然主義的) 순응>, 현인의 <도회적(都會的) 낭만의 싱그런 찬가>, 김정구의 <만요(漫謠)로 풀어낸 희화화(戱畵化)한 인생>, 손인호의 <서글픈 군상(群像)들의 절절한 푸념과 절망> 등등의 세계를 찾아볼 수 있지만 남인수는 그런 모든 정서들을 보듬고 나아가 변증법적(辨證法的)인 가요 체계(體系)를 완성한 유일한 가수다.

시대의 허무를 가슴 깊은 곳에서 장중(莊重)하게 표현한 <울며헤진 부산항>은 천년의 무게를 감당하며 지금도 애잔한 민족의 아픔으로 다가오고 있고, <감격시대>는 역사의 예감으로 환희에 찬 민족의 약동(躍動)을 벽력처럼 표현했으며, 슬픈 세월의 비감(悲感)과 유랑의 아픔은 <청노새 탄식>속에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절망과 탄식에 젖은 당대의 '모던 뽀이 , 모던 껄' 들의 눈믈을 떨어지는 눈에 대입한 <눈오는 네온가>는 서글픈 인생들의 애환을 달랜 명곡으로까지 확산되었고, <작별>은 이별의 아픔을 오히려 맑고 깨끗한 소리로 걸러 순수 결정(結晶)을 가슴에 새겼으며, 한국 가요 3대 명곡의 하나인 <산유화>는 피로 물든 각혈 같은 아픔을 떨어지는 꽃잎 하나하나에 새겨 사랑과 존재의 문법을 몽타주시켰다. 시간속의 존재라는 철학적 시점에서 <낙화유수>는 인생의 넉넉한 마음을 '관조(觀照)와 흐름' 속에 풀어냈으며, 그리고 한국인의 마음에 다함없는 恨의 정조를 심어준 <애수의 소야곡>은 우리 가요의 첫머리를 장식한 진정한 친아버지로 남았다.

뿐인가. 역사의 격랑 속에서 그의 노래들은 더욱 빛났다. 해방이 되고, 삼팔선으로 남북이 갈리자 해방 후 첫 취입곡으로 <가거라 삼팔선>을 발표하여 분단의 아픔을 달랬고, <달도 하나 해도 하나>로 분열로 치닫는 민족의 동질성을 절절히 호소했으며, 피난살이의 설움과 이별을 <이별의 부산 정거장>에 그려 한 시대를 뒤흔든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어느 백의(白衣)의 천사가 걸어온 거룩한 삶을 <오, 이 나라 나이팅겔 이효정님!>에 실었으며, 나환자의 서글픈 인생을 <님의 통곡>으로 위로하였고, 4·19의거로 희생된 학생들을 <사월의 깃발>로 추모하기도 했다. 그만큼 다양한 주제들을 변증법적 체계로 완성한 가수는 전무후무하며, 동시에 격동의 시대를 증언하고, 위로한 몫은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할 정도다.

넷째, 완벽한 프로 정신-,

그는 가수로서의 프로 정신이 확고했다. 술과 담배를 멀리하여 절제된 생활 태도로 목소리를 지켰으며, 무대에 서기 위해 잠을 잘 때도 단정히 빗은 머리를 조금도 흩뜨리지 않았고, 일단 무대에 서면 혼신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그를 기다리는 국민들을 위해 자신을 엄격히 다스리는 이런 태도는 진정한 프로의 모습으로서 그를 라이브의 황제로 부른 것도 아마 이런 프로 정신 때문일 것이다.

작고하기 3개월 전까지도 무대에 섰으며, 병으로 고통받을 때 앉아서 취입을 하면서도 오히려 더욱 깊이 있는 창법으로 열창하여 원 테이크로 완성할 수 있게 하여 오히려 사람들을 숙연하게 했다. 그의 프로 정신은 후배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으며, 그를 오랜 세월 흔들림없는 당대 최정상의 가수로 흠모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가 죽었을 때 한국 연예사상 최초로 연예협회장이 엄수되었다. 애수의 소야곡이 울려 퍼지며 후배들과 팬들의 오열 속에 그는 불멸의 가요 황제로자리잡았다. 오히려 그가 죽고 나자 그를 숭모하고 본받으려는 많은 후배 가수들이 속속 나타났고, '기념사업회' 와 '팬클럽'이 결성되었으며, '남인수 가요제'가 개최되어 유망한 신인들이 등용되었다. 더구나 신해성은 <아, 그 이름 남인수!>란 타이틀로 취입까지 하여 우리 가요에서 특정 가수에게 바치는 유일한 헌정곡(獻呈曲)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은 우리 가요에서는 전무후무한 일들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프로 정신이 뚜렷한 그의 진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3. 살아있는 남인수

남인수는 오늘에 생생한 현재형으로 존재한다. 비록 우리 가요의 감성이 퇴색되어 그의 이름과 노래를 모르는 세대들이 늘어가지만 부모로부터 들어온 30대 이후 세대에서는 아직도 그는 마력적 존재로 살아 숨쉰다. 그가 나라 잃은 민족의 한과 슬픔을, 생사를 넘나들던 전쟁 시절 한끼 밥이 절실하던 당대의 고통과 눈물을 꺾이지 않는 자유와 희망으로 진지하게 위로했음을, 그리하여 그의 노래들이 다음 세대에서도 불사조처럼 되살아날 것임을.

한 개인인 가수가 그 시대를 사는 대중에게 주는 위로와 행복은 어떤 말이나 돈으로 따질 수 없다. 하물며 그의 이름 자체가 바로 가요의 표상으로서 수많은 대중들의 애환을 달랜 바에야..

미성박명(美聲薄命)인가? 사십 대의 젊은 나이로 바람처럼 세상을 버린 사람이지만 오히려 오늘에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가요황제다. 남인수는!

 
* 출처/ 가요114 남인수팬클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