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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김수호-동아행복시 430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바다의 용서 - 정일근(1958∼ ) [동아/ 2011-09-17]

바다의 용서 - 정일근(1958∼ ) 누군가 용서하고 싶은 날 바다로 가자 누군가 용서하며 울고 싶은 날 바다로 가자 나는 바다에서 뭍으로 진화해 온 등 푸른 생선이었는지 몰라, 당신은 흰 살 고운 생선이었는지 몰라 바다는 언제나 우리의 눈물 받아 제 살에 푸르고 하얗게 섞어 주는 것이니 바다 앞에서 용서하지 못할 사람 없고 용서받지 못할 사랑은 없으니 바다가 모든 것 다 받아 주듯이 용서하자 마침내 용서하는 날은 바다가 혼자서 울 듯이 홀로 울자 태풍은 삶의 터전에 상처를 남겼고 명절은 누군가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겼다. 오랜만에 보는 일가 피붙이가 모두 반갑기만 할 수 없다. 누군가는 밉고 누군가는 불편하다. 그런 사람 전혀 없고 헤어질 때 아쉽기만 했다면 복 받은 것이다. 갈 때는 선물을 들고 갔다가..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나무에게 보내는 택배 - 송경동 [동아/ 2022-09-03]

나무에게 보내는 택배 - 송경동(1967∼ ) 다시 태어나면 산동네 비탈 굴 껍데기처럼 다닥다닥 붙어 사는 이들에게 시원한 바람이나 눈송이를 배달해주는 씩씩한 택배기사가 되었으면 좋겠네 재벌과 플랫폼 업자들이 다 나눠 먹고 티끌 같은 건당 수수료밖에 안 떨어지는 이승의 목마른 비정규직 택배 일 말고 인생에 꼭 필요한 사랑의 원소들 이 추운 겨울날 저 따뜻한 햇볕처럼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지는 온정과 눈부심을 배달하는 무욕의 택배기사 옛날에 양복 입고 넥타이 매고 돈 잘 버는 직장에 가게 된 한 시인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성공을 부러워했다. 그래서 시인은 낮에 웃었다. 그런데 밤에는 시가 써지지 않는다고 울었다. 나는 그 밤을 훔쳐본 적이 있다. 그때 사회적인 활동과 시 창작은 서로를 밀어낸다고 생각했다..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월명(月明) - 박제천(1945∼) [동아/ 2022-08-27]

월명(月明) - 박제천(1945∼) 한 그루 나무의 수백 가지에 매달린 수만의 나뭇잎들이 모두 나무를 떠나간다. 수만의 나뭇잎들이 떠나가는 그 길을 나도 한 줄기 바람으로 따라 나선다. 때에 절은 살의 무게 허욕에 부풀은 마음의 무게로 뒤처져서 허둥거린다. 앞장서던 나뭇잎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쩌다 웅덩이에 처박힌 나뭇잎 하나 달을 싣고 있다. 에라 어차피 놓친 길 잡초더미도 기웃거리고 슬그머니 웅덩이도 흔들어 놀 밖에 죽음 또한 별것인가 서로 가는 길을 모를 밖에 매년 입추가 지나면 바람의 온도가 달라진다. 처서까지 지나면 바람의 냄새도 달라진다. 사람도 동물이라서 이런 변화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끈적임은 선선함으로 변했고, 이제 곧 새 계절이 올 것이다. 시를 읽기에 가을만큼 좋은 계절은 없다..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눈물의 형태 - 김중일(1977∼ ) [동아/ 2022-08-20]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눈물의 형태 - 김중일(1977∼ ) [동아/ 2022-08-20] 눈물의 형태 - 김중일(1977∼ ) 언젠가 식탁 유리 위에 한 줌의 생쌀을 흩어놓고 쇠젓가락으로 하나하나 집으니 어느새 눈물이 거짓말처럼 멎는 거야 여전히 나는 계속 울고 있었는데, 마치 공기 중에 눈물이 기화된 것처럼 그런 이야기를 하며 또 너는 운다 나는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쇠젓가락을 가지고 네 맞은편에 앉는다 그리고 쌀알처럼 떨어진 네 눈물을 아무 말 없이 하나하나 집는다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의 형태라는 듯 (하략) 슬플 때면 대청소하는 사람을 알고 있다. 속상할 때 설거지를 더 뽀득하게 하는 사람도 알고 있다. 말해서 무엇 하리. 일부의 심정은 말로 풀어지기에는 너무 단단하고..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초록 풀물 - 공재동(1949∼ ) [동아/ 2022-08-13]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초록 풀물 - 공재동(1949∼ ) [동아/ 2022-08-13] 초록 풀물 - 공재동(1949∼ ) 풀밭에서 무심코 풀을 깔고 앉았다. 바지에 배인 초록 풀물 초록 풀물은 풀들의 피다. 빨아도 지지 않는 풀들의 아픔 오늘은 온종일 가슴이 아프다. 얼마 전만 해도 사람들은 코로나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셨는지” 서로의 안부를 물었는데 지금은 좀 달라졌다. 코로나 대신 폭우에 “무탈하셨는지”를 묻는다. 서울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괜찮은지 전화가 오고 충남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괜찮은가 전화를 건다. 그만큼 곳곳이 난리다. 한창 폭우가 내리던 때 나는 건물에 고립된 딸을 찾으러 길을 나섰는데 물은 점점 깊어져 허리까지 차올랐다. 두 팔을 들고 걸어야 할 정도였다. 사방은 위험하고..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날개뼈 - 조온윤(1993∼) [동아/ 2022-08-06]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날개뼈 - 조온윤(1993∼) [동아/ 2022-08-06] 날개뼈 - 조온윤(1993∼) 네가 길바닥에 웅크려 앉아 네 몸보다 작은 것들을 돌볼 때 가만히 솟아오르는 비밀이 있지 태어나 한 번도 미끄러진 적 없는 생경한 언덕 위처럼 녹은 밀랍을 뚝뚝 흘리며 부러진 발로 걸어가는 그곳 인간의 등 뒤에 숨겨두고 데려가지 않은 새들의 무덤처럼 시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시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가장 어렵다. 시는 무엇이고 시인은 누구인가. 천 명이 대답한다면 천 개의 답변이 생길 질문이고 한 사람이 천 번을 대답한다면 백 개의 답변이 생길 질문이다. 시는 감정의 토로일까, 난해한 운문일까. 지금 묻는다면 나는 시는 ‘비밀의 무덤’이라고 답변하겠다. 바로 이 시를 근거로 말이다.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1964∼ ) [동아/ 2022-07-30]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1964∼ ) [동아/ 2022-07-30]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1964∼ )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자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엄청나게 많은 아포리즘을 남겼는데 “제때 죽어라”는 것도 그중의 하나이다. 제때 죽는다는 것은 할 일을 다 하고 인생을 완수하는 것을 말한다. 성공적인 인생의 최종적인 조건인 셈이다. 이렇듯 제때 죽기..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남해 보리암에서 - 김원각(1941∼2016) [동아/ 2022-07-23]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남해 보리암에서 - 김원각(1941∼2016) [동아/ 2022-07-23] 남해 보리암에서 - 김원각(1941∼2016) 소원 따위는 없고, 빈 하늘에 부끄럽다 이 세상 누구에게도 그리움 되지 못한 몸 여기 와 무슨 기도냐 별 아래 그냥 취해 잤다 남해에는 금산이 있다. 그곳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는 곧잘 들었다. 시 공부하는 사람은 이야기를 사람에게서 듣지 않고 시로부터 듣는다. 남해의 금산 이야기를 가장 널리 알린 사람은 이성복 시인이다. 그는 ‘남해 금산’이라는 아주 아름답고 환상적인 시를 쓴 적이 있다. 그런데 무려 남해인데 우리에게 남해의 시가 하나뿐일 리가 없다. 그래서 오늘은 또 다른 절창을 소개하고자 한다. 남해에 주석처럼 달려 있어야 할 ‘남해 보리암에서’이다.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 최백규(1992∼ ) [동아/ 2022-07-16]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 최백규(1992∼ ) [동아/ 2022-07-16]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 최백규(1992∼ ) 나를 번역할 수 있다면 뜨거운 여름일 것이다 꽃가지 꺾어 창백한 입술에 수분하면 교실을 뒤덮는 꽃 꺼지라고 뺨 때리고 미안하다며 멀리 계절을 던질 때 외로운 날씨 위로 떨어져 지금껏 펑펑 우는 나무들 천천히 지구가 돌고 오늘은 이곳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단 한번 사랑한 적 있지만 다시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과 너의 종교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몇 평의 바닷가와 마지막 축제를 되감을 때마다 나는 모든 것에게 거리를 느끼기 시작한다 누군가 학교에 불이 났다고 외칠 땐 벤치에 앉아 손을 잡고 있었다 운명이 정말 예뻐서 서로의 벚꽃을 떨어뜨린..

[나민애의 시가깃든 삶] 인간의 길 - 황규관(1968∼) [동아/ 2022-07-09]

[나민애의 시가깃든 삶] 인간의 길 - 황규관(1968∼) [동아/ 2022-07-09] 인간의 길 - 황규관(1968∼) 고래의 길과 / 갯지렁이의 길과 너구리의 길과 / 딱정벌레의 길과 제비꽃의 길과 / 굴참나무의 길과 북방개개비의 길이 있고 드디어 인간의 길이 생겼다 그리고 인간의 길옆에 피투성이가 된 고양이가 버려져 있다 북방개개비의 길과 / 굴참나무의 길과 제비꽃의 길과 / 딱정벌레의 길과 너구리의 길과 / 갯지렁이의 길과 고래의 길이 사라지고 드디어 인간의 길만 남았다 그리고 인간의 길옆에 길 잃은 인간이 버려져 있다 김소월의 시는 왜 인기가 많을까. 어렵지 않다는 점이 가장 크다. 그의 시는 낮은 자리의 시다. 유식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소월의 시는 흔한 감정을 다룬다. 헤어짐을 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