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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김수호-동아행복시 430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뒤편 ― 천양희(1942∼) [동아/ 2022-04-23]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뒤편 ― 천양희(1942∼) [동아/ 2022-04-23] 뒤편 ― 천양희(1942∼)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 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Passion’이라는 단어는 열정이라는 뜻이다. 누구든 열정을 좋다고 알고 있지만 이 단어에는 반전이 있다. 여기에는 고통, 그리고 수난이라는 뜻도 함께 있다. 우리가 간절히 갈망하는 대상이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는 말이다. 때로는 가장 좋은 것이 가장 위험하다. 때로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깊은 상처를 준다. 맞다. 소중한 사람은 가히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다. 혹시라도 소중한 사람..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 장석주(1954∼) [동아/ 2022-04-16]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 장석주(1954∼) [동아/ 2022-04-16]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 장석주(1954∼) 땅거미 내릴 무렵 광대한 저수지 건너편 외딴 함석 지붕 집 굴뚝에서 빠져나온 연기가 흩어진다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오, 저것이야! 아직 내가 살아 보지 못한 느림! 우리는 ‘깊은 심심함’을 잃어가고 있다. 심심하지 않은 것이 대체 어떻단 말인가. 백수를 조롱하는 말인가. 이렇게 반문한다면 나는 심심하기는커녕 점점 바빠지는 현대의 삶이 급기야 질병처럼 느껴진다고 대답하겠다. 현대인은 모두 바빠지는 병에 걸린 자이다. 오늘 바쁜데 내일은 더 바쁘다. 동시에 여러 작업을 수행하는 멀티태스킹의 인간이어야 하고 점점 더 많은 성과를 내야 한다. 이것을 철학자..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새 봄의 기도 -박희진(1931∼2015) [동아/ 2022-04-09]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새 봄의 기도 -박희진(1931∼2015) [동아/ 2022-04-09] 새봄의 기도 - 박희진(1931∼2015) 이 봄엔 풀리게 내 뼛속에 얼었던 어둠까지 풀리게 하옵소서. 온 겨우내 검은 침묵으로 추위를 견디었던 나무엔 가지마다 초록의 눈을, 그리고 땅속의 벌레들마저 눈 뜨게 하옵소서. 이제사 풀리는 하늘의 아지랑이, 골짜기마다 트이는 목청, 내 혈관을 꿰뚫고 흐르는 새 소리, 물 소리에 귀는 열리게 나팔꽃인 양, 그리고 죽음의 못물이던 이 눈엔 생기를, 가슴엔 사랑을 불 붙게 하옵소서. 이 작품은 ‘봄’ 더하기 ‘기도’의 작품이다. 기도가 등장한대서 꼭 기독교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기도는 모두의 것이고 만고의 것이다. 불교도였던 시인 한용운도 기도를 아주 잘 했다. 1..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원동시편·9 ― 간이역 - 고영조(1946∼) [동아/ 2022-04-02]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원동시편·9 ― 간이역 - 고영조(1946∼) [동아/ 2022-04-02] 원동시편·9 ― 간이역 - 고영조(1946∼) 작은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 작은 것은 몸으로 봅니다. 내 몸이 머무는 곳에 보랏빛 제비꽃은 피어 있습니다. 언덕 아래 몸을 숨기고 원동역은 아득히 그곳에 있습니다. 원동역은 원동마을에 있다. 간이역이라고 하니 교통의 요충지는 아니다. 간이역을 품고 있는 원동마을도 번화한 곳은 아닐 것이다. 여행 좀 다녀본 사람들은 그곳을 아름답다고 평한다. 특히 봄이면 매화가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하지만 구름처럼 몰려드는 사람들과 구름처럼 피어난 매화는 이 시에 없다. 이 시인은 매화가 아니라 원동역 그 자체를 보고 있다. 매화가 피든, 피지 않든 시인에게 원동역..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 이어령(1934∼2022) [동아/ 2022-03-26]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 이어령(1934∼2022) [동아/ 2022-03-26]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살던 집이 있을까 ― 이어령(1934∼2022)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살던 집이 있을까 네가 돌아와 차고 문을 열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네가 운전하며 달리던 가로수 길이 거기 있을까 네가 없어도 바다로 내려가던 하얀 언덕길이 거기 있을까 바람처럼 스쳐간 흑인 소년의 자전거 바큇살이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을까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아침마다 작은 갯벌에 오던 바닷새들이 거기 있을까. 시집을 받고 나서 딸아이와 이 작품을 읽었다. “무슨 시 같아?”라고 물어봤더니 열다섯 살 아이는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헤어졌다는 것 같아.” 아이는 대답과 시집을 남..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나에게 묻는다 ― 이산하(1960∼) [동아/ 2022-03-19]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나에게 묻는다 ― 이산하(1960∼) [동아/ 2022-03-19] 나에게 묻는다 - 이산하(1960∼) 꽃이 대충 피더냐. 이 세상에 대충 피는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소리 내며 피더냐. 이 세상에 시끄러운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어떻게 생겼더냐. 이 세상에 똑같은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모두 아름답더냐. 이 세상에 아프지 않은 꽃은 하나도 없다. 꽃이 언제 피고 지더냐. 이 세상의 꽃들은 모두 언제나 최초로 피고 최후로 진다. 문답법은 일종의 화술이요, 수사학이다.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면 그것은 일종의 담론이 된다. 이것은 공자라든가 소크라테스가 잘 보여준 바 있다. 질문과 대답의 이어짐을 우리는 철학이라고 부른다. 평범한 질문에 특별한 대답이 따라오면 그것은 깨달음이..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오리 - 우대식(1965∼ ) [동아/ 2022-03-12]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오리 - 우대식(1965∼ ) [동아/ 2022-03-12] 오리 ― 우대식(1965∼ ) 오리만 더 걸으면 복사꽃 필 것 같은 좁다란 오솔길이 있고, 한 오리만 더 가면 술누룩 박꽃처럼 피던 향이 박힌 성황당나무 등걸이 보인다 그곳에서 다시 오리, 봄이 거기 서 있을 것이다 오리만 가면 반달처럼 다사로운 무덤이 하나 있고 햇살에 겨운 종다리도 두메 위에 앉았고 오리만 가면 오리만 더 가면 어머니, 찔레꽃처럼 하얗게 서 계실 것이다 우리가 ‘아름다울 미(美)’라고 부르는 개념을 고대 그리스인들은 ‘칼론(kalon)’이라고 불렀다. 칼론은 육체의 눈과 정신의 눈으로 감지되는 덕목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 오래된 아름다움이 그리스인들에게 즐거움, 즉 쾌감을 선사했다고 설명한 바 있..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정채봉(1946∼2001) [동아/ 2022-03-05]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정채봉(1946∼2001) [동아/ 2022-03-05]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 정채봉(1946∼2001) 모래알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풀잎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너를 생각하게 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어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처음, 이 시는 강렬하지 않다. ‘언어의 조탁’이라고 해서 시는 갈고닦는 작업을 중시하는데, 이 시의 조탁은 특이하지 않다. 어조도 강하지 않다. 무던히 시작하여 덤덤히 끝난다. 그렇다고 단어의 선별이 특별한 것도 아니다. 너, 나, 모래알, 풀잎. 여기에 우리가 모르는 단어는 한 개도 없다. 그러나 읽은 후에는 상황이 바뀐다. 흔하디흔한 단어만 썼는데도 시가 남기는 울..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달우물 ― 조예린(1968∼) [동아/ 2022-02-26]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달우물 ― 조예린(1968∼) [동아/ 2022-02-26] 달우물 ― 조예린(1968∼) 폭풍이 씻어간 밤하늘이 검은 수정처럼 깨끗하다 바다는 모른다 모른다 하고 흩어진 폐허가 아직 잔설 같다 그 위로 샘물같이 솟아오르는 만월! 찢어진 날개를 물에 적신다 타는 물줄기를 따라 물을 들이킨다 달빛이 얼음보다 차다, 차다!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다.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다.’ 시인 이상이 시 ‘거울’에서 한 말이다. 이상의 시가 대개 그렇듯 뭔가 알고 쓴 듯하다. 때로 시를 읽다 보면 이상의 거울 이야기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시는 참 조용한 세계다. 언어로 되어 있으니 소리가 나지 않는다. 청각적 심상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속의 소리와 ..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다시 목련 ― 김광균(1914∼1993) [동아/ 2022-02-19]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다시 목련 ― 김광균(1914∼1993) [동아/ 2022-02-19] 다시 목련 ― 김광균(1914∼1993) 사월이 오면 목련은 왜 옛 마당을 찾아와 피는 것일까 어머님 가신 지 스물 네 해 무던히 오랜 세월이 흘러갔지만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잔디잎이 눈을 뜰 때면 어머님은 내 옆에 돌아와 서셔서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보신다 하루 아침엔 날이 흐리고 하늘에서 서러운 비가 나리더니 목련은 한잎 두잎 바람에 진다 목련이 지면 어머님은 옛 집을 떠나 내년 이맘때나 또 오시겠지 지는 꽃잎을 두 손에 받으며 어머님 가시는 길 울며 가볼까 겨울 하면 떠오르는 시인에는 김동환이나 백석이 있다. ‘국경의 밤’을 쓴 김동환은 함경북도 출신이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백석은 평안북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