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경의 시:선] 슬픈 계절 - 이윤설 [문화/ 2021-11-10]
슬픈 계절 - 이윤설
슬픈 생각을 따라가다보면 나는 기차가 되어 있다
몸이 길어지고 창문의 큰 눈이 밖으로 물뚱히 뜨여 있다 나는 길고, 달리다보면
창밖으로 식구들이 보인다 어쩌자고 식구들은 추운 민들레처럼 모여 플랫폼에서 국을 끓이고 있는지 내가 지나가는데도 나를 발견하지 못하여 기다리고만 있다
- 이윤설 ‘기차 생각’(시집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정신없는 중에 가을의 절반 이상을 보내버렸다. 유독 찬바람에 마음이 약해지는지라, 여름 끝 징후가 보이기 시작하면 지레 겁부터 먹는 내가 가을이 온 줄도 몰랐다니, 무심코 실소를 흘리고 만 것은 심야의 버스 안이었다. 외조부께서 돌아가셨다. 강연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뒤늦게 버스에 올라타 빈소로 향하는 길 내내 창밖만 응시했다. 듬성듬성, 그새 몇 안 남은 가로수들 나뭇잎과 두툼한 차림의 사람들을 보고서야, 아차, 가을이구나 했다. 그리고 창문엔 중년으로 향해 가는 내가 어려 있었다.
외조부는 워낙 자유로운 분이셔서, 가족들과 교류가 없었다. 암만 생각해도 그와 추억할 거리가 없었다. 그러니 딱히 슬플 일도 없건만 왜 자꾸 눈자위가 뜨듯해지는지 알 수 없었다. 가을 때문이다. 잊고 있던 가을이 몰아닥쳐 그렇다. 그러나 버스가 장례식장에 가까워갈수록 짙어지는 슬픔에 결국 울어버리고 말았다. 주책이구나 중얼거렸다. 동시에 내가 얼마나 외조부를 닮았는지 깨닫고 있었다. 창문에 비친 나는 영락없는 외조부의 모습이었다. 실은 내 성정의 대부분도 그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런 주제에 받은 것 없다 여겼다. 찾은 적도 찾아간 적도 없다. 미안함과 안타까움과 뒤섞여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가 버린 시간의 무상함이 저릿하게 찾아왔다. 간신히 제때 내렸다. 깜깜한 거리 저쪽에 장례식장 간판이 불 밝히고 있었다. [유희경 시인·서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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