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경의 시:선]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 - 정다연 [문화/ 2021-10-20]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 - 정다연
천사가 지나가는 동안 당신은
찻잔에 입술을 댄다 창밖으로는 세쌍의 새가 서로를 향해 날아오르고 넘칠 듯 들이치는 햇빛이 지나가는 사람의 옆모습을 비추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에
- 정다연, ‘천사가 지나가는 동안’(시집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
모처럼 평일 휴가다. 오랜만에 머리도 자르고 필요한 것들도 구매하려고 나섰다. 이른 오후를 만끽하며 걷던 참이었다. 전화기가 울린다. 문자메시지가 와 있다. 잊고 있던 일을 독촉한다. 간곡한 어조로, 서둘러 처리해달라는 종용이 담겨 있다. 서둘러 카페를 찾아 들어간다. 노트북을 열고 파일을 찾아 문서를 작성해 부랴부랴 전송한다. 숨이 턱 막히고 놓친 일이 없는가 싶어 불안해진다. 도무지 끝나지 않는구나.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고 허리를 펴본다.
건너편 자리에 친구 사이로 보이는 청년 둘이 앉아 있다. 시끄럽다 싶게 떠들어서 눈살 찌푸리게 했던 이들이다. 결국 이어폰을 찾게 만들었던 그들이 조용하다. 무엇 때문일까. 가만 보니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다. 순간 픽- 웃고 말았다.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을 맞이했구나. 여럿이 모여 떠들다 일순 조용해지는 느닷없는 현상을 유럽에선 그렇게 표현한다던데. 그 짧은 시간을 못 견디고 휴대전화를 보고 있구나. 우스워하다가, 내 처지라고 뭐 다를 게 있나 싶어졌다. 휴가를 만끽하겠다고 나섰다가 한 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노트북을 켜고 만 나는 더 한심하다. 그럴 짬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핑계 아닌가. 그 순간을 괜히 천사라는 존재로 표현하겠어. 그것이 여유이기 때문이다. 쫓듯 쫓기듯 급하다간, 천사가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살게 되겠지. 이건 패배다. 패배가 아닐 수 없다. 소리 내어 노트북을 덮었다. 어떤 답장이 오든 오늘은 쉬겠어, 다짐하면서. [유희경 시인·서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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