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언덕 - 노천명 (1912∼1957)
아카시아꽃 핀 6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들다
이 인파 속에서 고독이
곧 얼음모양 꼿꼿이 얼어 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보리밭엔 양귀비꽃이
으스러지게 고운데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해볼 사람은 없어 (…)
장미가 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사슴이 말을 안 하는 연유도
알아 듣겠다 (…)
아카시아 꽃 못 본 지 한참 되었다. 세검정 골짜기에 울창한 아카시아 잔가지를 손으로 툭툭 건드려 꺾으며, 누구께 잎이 많이 달렸나? 친구와 내기를 하며 산길을 내려왔다. 아카시아 우거진 학창 시절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들려 노천명의 ‘사슴의 노래’를 샀다.
1958년 초판본을 그대로 인쇄한 표지가 멋스럽다. 여성 시인이 드물고 귀하던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자신의 손으로 글을 써서 먹고살았던 여성. 독신으로 46세에 숨지기 전날에도 병원비를 벌려고 신문에 시를 발표했던 노천명. 한자투성이에 한글 세로 쓰기가 낯설어 영어 시집보다 더 읽기 어려웠던 그의 유고 시집 후기는 “저의 아주머니께서”로 시작한다. “아주머니의 그 짧았던 일생의 후반은 더욱 불행한 것이었습니다.”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 장미는 말을 배우지 않았고, 사슴은 먼 데 산만 쳐다 보았다. 조용한 비명이 페이지마다 쌓인 시집을 덮고 내 입에서 나온 말: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더 행복했을까.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 6월의 언덕 (시 전문)
아카시아꽃 핀 6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들다
이 인파 속에서 고독이
곧 얼음모양 꼿꼿이 얼어 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보리밭엔 양귀비꽃이 으스러지게 고운데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해볼 사람은 없어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어 가지고 안으로만 들다
장미가 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사슴이 말을 안 하는 연유도
알아 듣겠다
아카시아꽃 핀 6월의 언덕은
곱기만 한데-
- 노천명 (1912∼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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