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문재인 문제 - 박상훈 | 정치발전소 학교장 (경향/ 150215)
만약에 정말 만약에,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의 제안대로 이완구 총리 후보자 인준 여부를 여론조사로 결정한다고 해보자.
결과는 어땠을까. 문 대표의 기대와는 아주 딴판이 되었을 것이다. 단순히 여론조사를 해본다는 것과 여론조사로 구속력 있는 공적 결정을 하는 것의 차이는, 반딧불과 벼락만큼이나 크기 때문이다.
우선 이 후보자를 총리감이 아니라고 본 시민 가운데 “그렇다고 여론조사로 인준이 부결되었을 때 나타날 재난적 사태를 감수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여론조사 응답에 기권하거나 인준 찬성 쪽으로 돌아설 것이다. 국회에서 표결로 결정한다는 헌법 조항을 어긴 것도 부담이 되거니와, 시민사회가 찬반으로 양분되는 것이 가져올 사태도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여론조사로 부결이 결정된다면? 그 뒤 벌어질 사태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야권 지지자들도 크게 동요할 것이다. 불과 일주일 전에 있었던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에서 ‘여론조사 룰 변경’ 때문에 문재인 후보가 승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나쁜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런 야권 지지자일수록 어떤 선택을 할지를 두고 복잡한 심사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게 끝이 아니다. 상황이 이쯤 되면 총리 후보자 인준 여론조사는 이미 ‘이완구 문제’가 아닌 ‘문재인 문제’로 바뀌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망론’을 지지하는 시민들은 열정적으로 나설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작용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완구 총리 후보자 인준 반대’가 곧 ‘문재인 대권 지지’와 같은 의미로 되는 것을 불편해하는 시민들은 이 상황이 결코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총리 후보자 인준 여론조사에서도 룰 결정 문제는 간단치 않다. 업체 선정 기준을 어떻게 할지, 조사 방법 및 질문 구성은 어떻게 할지, 인준 찬반 응답을 단순 비교해서 결정할지, 과반의 찬성을 인준 기준으로 할지, ‘지지 여부 잘 모르겠음’ 같은 중립적 답을 한 시민 의견은 어떻게 처리할지 등을 둘러싸고 논란과 공방이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시민사회 역시 양극으로 나뉘어져 사납게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국론 분열’이 초래된 것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지게 될까. 정치권 전체의 무능함과 무책임함에 대한 비난이 무엇보다 크겠지만, ‘문 대표 문제론’도 만만치 않게 제기될 수 있다.
여론조사 없는 현대 정치는 없다고 할 정도로, 여론조사의 활용은 계속해서 증가해왔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여론조사는 ‘소극적 지식’ 이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 여론조사 결과를 참고할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공적 결정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공적 결정만큼 ‘책임성의 원리’를 수반하는 것도 없다. 내려진 결정은 반드시 집행되어야 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공권력이라고 하는 합법적 폭력 내지 강제력이기 때문이다. 여론조사가 그런 책임성을 가질 수 없는 건 당연한데, 더 큰 문제는 ‘여론조사와 시민 의견의 일치성’이 반드시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도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듯, 여론조사와 선거로 나타난 실제 시민 의견이 서로 다른 결과를 낳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저널리즘의 역사에서 가장 치욕인 사건들 중에는 여론조사에 지나치게 의존한 언론보도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그런데도 여론조사 결과를 강제로 집행하게 된다면, 정당성 시비와 분란은 피할 수가 없다.
누구보다도 그 폐해를 심각하게 경험한 것은 야당 자신이다. 당직과 공직 후보 결정에 이른바 ‘국민 의견’을 반영하겠다며 여론조사와 국민경선제를 적용하기 시작하면서 ‘여론 동원과 사조직 동원에 의존하는 정치’는 심화되고 당은 분열과 분란 속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신의 뜻을 앞세운 성전(holy war)이 가장 비인간적인 폭력과 비극으로 귀결되듯이, ‘국민을 앞세우는 정치’는 필연적으로 사회를 분열로 이끈다는 것이야말로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이론이다.
정치란, 불완전한 인간들의 사회를 내전으로 이끌지 않기 위해 민주주의자들이 감수하는 불완전한 협의와 결정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 과정과 결과가 좋아야 사회가 좋아진다.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대신 여론 동원에 과하게 의존하는 문 대표의 일하는 방식은, 그래서 문제가 있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정치의 규범은 지키면서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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