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통신] 아이언브리지(Ironbridge)에서 한국의 '더비家'를 생각한다 - 문갑식 기자 (조선/ 150209)
▲ 문갑식 선임기자 |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3시간을 차로 달리면 버밍엄을 거쳐 텔퍼드에 닿는다. 고속도로 주변에 굴뚝이 줄지어 있는 공장지대다. 거기서 시작되는 험한 계곡 사이로 흐르는 게 세번(Severn)강이다. 폭이 30~50m 남짓이다. 개천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세번강은 한때 유럽에서 물동량이 둘째로 많았다고 한다. 우리 말로 '협곡(峽谷)의 철교(鐵橋)'라는 뜻의 '아이언브리지 고지(The Ironbridge Gorge)'는 그 골짜기를 잇는 다리다.
이 일반명사가 '콜브룩데일'이란 지명을 밀어낸 사연이 있다. 콜브룩데일은 철을 제련하는 동네다. 무쇠를 녹이는 노(爐)부터 쇠바퀴·철로·기관차가 여기서 세계 처음 발명돼 산업혁명의 요람으로 공인됐다.
콜브룩데일에는 더비가(家)의 집념이 어려있다. 더비 1세는 용광로를 개발했고, 아들 더비 2세는 증기기관을 실용화했다. 손자 더비 3세는 3대에 걸친 '철의 신화(神話)'를 아이언브리지 건설로 완성시킨 것이다. 1775년 더비 3세는 건축가 토머스 프리처드의 '세번 철교' 제안에 자본을 쾌척했다. 4년 뒤 쇠 378t이 들어간 길이 30.68m의 반구형 철교가 완성되자 탄가루 날리던 동네에 다리를 그리려는 예술가들이 몰려들었다.
어둠 깃든 계곡에 눈발이 날리던 날, 나는 철제 아치를 오가며 한국의 '더비가(家)'와 '아이언브리지'를 생각했다. 포항제철 신화를 이룬 박정희와 박태준을 떠올렸으나 진짜 주역은 그 시대의 선배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지금 팔순인 1935년생들은 공산주의에 맞서 대한민국을 지켰다. 칠순의 1945년생들은 근대화의 기수(旗手)가 됐고, 육순의 1955년생들은 성장의 기적을 이뤘다.
이들 '35~55 세대'의 공통점은 많다. 그들은 땀과 눈물과 배고픔을 경험했다. 맨손으로 '하면 된다'는 기적도 창출했다. 그들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동급 최강의 세대였다.
비슷한 점은 또 있다. 그들은 자식을 배불리고도 '책임지지 않았다'고 비판받았다. 그들의 업적은 '토(吐)가 나온다'고 일축됐다. 그들이 살던 세월은 '괴물 같은 시대'로 폄하됐다.
그들만큼 세계에서 최고로 억울한 세대는 없었다. 다행히 지난해부터 우리 사회에 새 기류가 불고 있다. '복고(復古)'라는 간판이지만 실상 자랑스러운 역사에 대한 재인식으로 볼 수 있다. 그중 주목할 사례가 영화 '명량(鳴梁)' '국제시장'의 흥행이다. 내가 눈여겨보는 것은 관객 수가 아니라 일부의 시대착오적 비판에 대한 대한민국 전체의 반발이다. 이것은 몇 년 전까지도 생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35~55 세대'의 족적(足跡)은 한반도뿐 아니라 월남의 정글, 옛 서독의 탄광·병원, 중동의 사막에 뚜렷이 남아있다. 이 '35~55 세대'는 또다시 올지 모를 위기 때 반등의 기폭제가 될 것이다. 그 자랑스러운 자산과 후배들이 세번강 협곡을 잇는 아이언브리지처럼 연결될 때 갈등과 반목에 휩싸였던 한국을 세계는 다시 주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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