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노인암살단'은 어디로 갔을까 / 조우석 문화평론가 | 2013.02.02
지난 18대 대선 직후 들려온 이야기 중 개운하지 않은 게 몇 개 있다. 선거 결과에 실망한 젊은 층 사이에서 곧 노인 암살단이 등장할 것이란 예견이 그 하나인데, 좀 섬뜩했다. 선거 직후 “노인들의 노령연금을 없애자”, “전철 무료화 반대한다”는 농담 섞인 말이 돌더니 급기야 차원 낮은 선동이 등장한 것이었다. 마음에 걸리는 게 트위터에 글을 올렸던 사람의 신원이다. 철부지 나이도 아니고 50세라는 점, 서울대 강사와 서울시 문화재위원 등을 지냈다고 하니 더욱 안타깝다.
물론 예외적 인물이 벌인 예외적 소동일 것이다. 하지만 사회 주류와 시스템에 대한 한국사회 특유의 적대 심리가 이제는 중장년층에까지 퍼져있고, 식자께나 들었다는 사람도 가리지 않는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미국의 파웰보고서의 지적처럼 "겉으로는 아주 반듯해 보이는 사회구성원들입니다. 즉 대학가, 종교계, 언론계, 지식인, 문학계, 학계, 정계 인사들이 나서서 체제를 비판하고 있는" 상황과 닮은꼴이다. 대선 수(手)개표를 요구하는 황당한 목소리도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른바 ‘18대 대선 부정선거 진상규명 시민모임’ 등이 그들인데, 그들은 한 포털사이트의 청원자 23만여 명의 서명을 모아 재검표 청원서를 제출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개표 부정이라는 음모론 자체가 요즘 같은 세상에 헛웃음이 나올 판이다. 하
지만 중앙선관위 같은 국가기관이 이를 굳이 해명하기 위해 개표 시연을 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시민과 국회 경위가 충돌하는 해프닝도 발생하고, 그게 뭔가 어수선하고 중심이 안 잡힌 우리네의 현주소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소모적인 불신과 논쟁, 불필요한 사회적 분노는 어느덧 우리의 일상이 됐다.
너무도 소모적인 불신과 논쟁, 너무도 불필요한 사회적 분노
이 가운데에서도 충격적이었던 것이 바로 황창규 지식경제부 R&D 전략기획단장(전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 사장)의 서울대 사회학과 초빙교수 임용이 백지화 사건이다. 황창규의 임용을 반대한 분노의 쓰나미에 밀린 그 대학 교수진은 끝내 임용 포기를 해야 했다. 놀라운 것은 학생들의 반대 이유다. 그들은 “사회학이 노동 버리고 자본의 편에 서겠다는 거냐”는 식이다.
세상에 이런 시대착오와 우격다짐이 없다. 사회학의 창시자 막스 베버가 들었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만하다. 더 심한 건 서울대 로스쿨인권법학회 소속 학생들의 시대착오적이고, 뒤틀린 주장이다. “황창규의 전문적 식견이라는 건 노동자의 건강과 목숨을 대가로 이윤을 쥐어짜는 것이다.”
더 희한한 것은 이런 엉터리 주장에 일부 사회학과 대학원생들이 가세하고, 삼성전자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직원의 유족도 참석하면서 사태는 수렁에 빠져든다. 이게 한국사회의 메커니즘이다. 교수 임용이라고 하는 사회적으로 중립적인 사안이 어느 순간 정치사회적 문제로 후끈 비화하고 만다. 이걸 누구도 제지 못한다. 정부, 공권력, 기성세대 등 제도권은 이런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응대는커녕 연신 뒤로 물러서고 만다.
몇몇 사안이 보여주듯 안타깝게도 정치 현안에서 일상의 삶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에는 비정상의 기류가 흐르고 있다. 대선을 치른 뒤 우리는 100% 대한민국과 대통합 그리고 탕평책을 말하고 있지만,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필자가 판단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회통합에 장애� 되는 요소를 지역 갈등, 세대 갈등이란 두세 개 요소로 인수분해하고, 이것만 해결되면 사회통합을 이룰 수 있다지만, 그게 맞는 말일까?
진단이 잘못되면 처방도 엉뚱할 수 있다. 즉 대선 개표부정이란 음모론의 연기를 피워 올리는 집단이 젊은 층인 건 맞지만 노인암살단 이야기를 꺼낸 이는 엄연히 50세였다. 또 이런 종류의 일이 호남지역에 국한해 벌어지는 것도 아니다. 황창규 교수 임용 철회 건에서 드러나듯 서울대를 포함한 사회적 주류의 내부에서도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무엇이 문제일까? 한국사회 최대 문제인 사회통합에 최대 장애는 왜곡된 지식정보 차원의 영역이라고 필자는 규정한다.
지역 갈등, 세대 갈등이란 문제의 표면에 불과하며, 심층에는 훨씬 큰 현안인 왜곡된 지식 정보의 문제가 별도 있다. 한국사회의 책임있는 주류가 벌어야 할 문화전쟁이 겨냥해야 하고, 승부를 내야 할 주력전선도 이쪽이다. 즉 방향 모를 사회적 분노와 적대적 감정, 제도권 전반에 대한 묻지마 증오와 불신은 몇몇 집단과 진영 그리고 세대단절과 지역갈등의 문제가 아니라는 발견이 중요하다.
지역 갈등, 세대 갈등이란 문제의 표면에 불과하다
사실 기존의 표준적 지식과 정보를 엎어버리고, 주류 언론의 정보 유통을 거부하는 흐름은 이미 수십 년 동안 진행돼왔다. 그게 1970년대 민중문화운동이 펼쳐진 이후의 상황이다. 애초 문학 부문에서 시작해 미술, 영화, 연극 부문으로 가치를 쳤고, 이른바 1980년대 학술운동을 거쳐 지금은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자기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작업에 성공했다.
그 결과 춥고 배고팠던 1960~1970년대의 헝그리 사회는 이제 앵그리 사회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게 왜 문제일까? 정부·공권력·기성세대 등 제도권 전반에 대한 묻지마 증오와 불신은 정당한 사회적 분노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 결과 소모적이고 내출혈을 강요하고 있다. 그게 주변부화되고 파편화된 상태로 우리 시대 대중을 오염시켰다는 것도 문제이다.
즉 지식과 정보의 영역 전체에 퍼져있으며, 따라서 문화전쟁 차원의 청소작업이 진행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사회안정, 사회통합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게 이 글의 요지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과연 누가 어떻게 지식과 정보의 왜곡을 만들었을까? 이른바 한국사회 지식문화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좌파가 그걸 만들었다. 때문에 어떤 관찰자는 이렇게 말한다.
“좌파세력은 운동권, 시민단체, 인터넷 매체는 물론 방송, 사법부, 교육계, 공직사회까지 침투해 국기(國基)를 힘들고 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진지는 좌파에서 침투당했다.”(배진영 지음, <책으로 세상 읽기>, 151쪽)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게 좌파에 대한 공격으로 이 파괴적이고 잘못된 흐름이 바로 잡혀질 수 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사안의 심각성은 그 이상이다. 좌파의 진지 점령은 그들은 내몰아낸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물리적으로 그들을 내쫓을 수도 없거니와, 그들이 구축해놓은 지식과 정보라는 거대한 허구의 인프라는 어떻게 재구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이런 지식 정보에 오염당한 젊은이들의 치유 문제도 실로 심각하다. 자신들이 도덕 윤리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자신하는 이른바 좌파들의 비타협적 태도 역시 걱정이다.
즉 좌파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가치와 패러다임이 증오의 역사관이며, 사회적 분노만을 키울 뿐이라는 것을 외면한다. 그들의 잘못된 지식 정보가누적되고 진행될 경우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지적한 쓸모없는 지식, 즉 옵솔로지(obsoledge)의 거대한 잔해로 남을 것이라는 점을 미처 감안하지 않는다. 본래 옵솔로지는 영어 obsolete(쓸모없음)과 지식(knowledge)의 합성어인데, 변화의 속도가 빨라 지식이 못 쓰게 되는 것을 뜻했다.
그게 정보의 홍수로 인해 현상이라면, 한국사회에서는 다분히 정치적 완고함 때문에 빚어지는 비극적 현상이라는 게 다르다.많은 이들은 김대중 노무현 등 좌파정부 10년 사이에 많은 왜곡이 진행되었다고 말하지만, 진실은 또 다르다. 이미 한 세대가 넘는 동안 지식 정보의 편향과 왜곡이 진행되어 왔다. 지금 거론되고 있는 문화전쟁이 세대갈등, 지역 갈등의 차원을 넘어 지식 정보 영역에 손을 뻗어야 할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더구나 이들은 생산(대학교수를 포함한 연구 현장의 실무자 그룹)과 유통(인터넷 포털과 기회주의적 출판계 그리고 전교조) 그리고 소비(젊은 층)로 이어지는 지식정보의 잘못된 유통 사이클을 이미 완성했다.
이것이 거대한 지식정보의 불량 생태계를 형성했으며, 사회통합을 가로 막고 있는 거대한 실체라는 발견이 중요하다. 더욱이 이 지식정보의 생태계는 노장청(老壯靑)이 결합됐다. 대선과정에서 사실상의 선대본부 역할을 했던원탁회의 같은 60,70대 그룹이 앞장 서고, 이들이 중년과 청년 그룹까지 서로 밀어주고 당겨준다. 서로 얽혀있는 공생관계인 이들은 이익집단화 현상도 이미 보이고 있다.
원칙이 살아있는 사회통합이 되려면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문화운동이란 한마디로 대한민국 건국 65년사에 대한 총체적 긍정을 이끌어내는 기초 작업이다. 정부는 물론 시민부문이 함께 손잡고 펼쳐야 될 운동인데, 그것은 한국인들이 경험한 적 없었던 문명사의 대전환 과정인 20세기를 정치적 편견이 없이 바라보도록 유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국가이며,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나쁜 나라"라는, 그동안 주입된 고정관념과 가치관을 치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복하지만 새 정부의 국민대통합위가 해결해야 할 지역 갈등, 세대 갈등이 구조화된 실체는 따로 있으며, 그게 지식과 정보 문제라는 거대한 수면 아래의 문제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그걸 내버려둔 채 지역 갈등, 세대 갈등 양상의 표면에만 주목한다면, 거대한 빙상 아래를 살피지 못하는 어리석음일 뿐이다.
이미 쓸모없어진 시대착오적 지식정보가 사회적 분노와 결합되고, 건국 이래 대한민국 역사의 긍지를 무시하는 게 사회통합을 가로막는 최대 원인인데, 이것은 문화운동을 통해 치유되고 바로 잡혀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것이 원칙있는 사회통합이자, 제대로 전개되어야 할 문화운동의 전개 원칙이다. 이명박 정부도 나름 사회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명분 좋은 화합과 포용을 기치로 내세웠고, 틈만 나면 공정사회 구호를 외쳤던 그들은 2008년 광우병 파동에서 결정적으로 외상(外傷)을 입었으면서도 아니 그런 척을 했다. 외려 다 모두를 끌어안겠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하지만 그건 대범함과 포용이 아니었고, 겁먹은 것에 불과했다.
억지웃음 속에 끌어안는 척을 했지만, 지역 갈등, 이념 갈등, 세대 갈등의 상대방 쪽 진영은 그런 수를 죄다 읽고 있었고, 등 돌린 채 냉소를 보냈다. 정부 쪽은 겨우 대통령 산하 사회통합위원회를 만들었고, 좌파 성향의 인사를 사회통합수석비서관으로 기용했지만, 상황이 바뀐 것은 없다. 새로 들어선 박근혜 정부가 100% 대한민국과 대통합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달라야 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어쩌면 정부에 못지 않게 시민부문에서 나서야 할 지 모른다. 사회통합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유지와 사회적 합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자본 형성을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파웰 보고서에도 나오지만, 사회적 분노를 증폭시켜 정치적 이익을 챙기려는 세력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법이다. 이게 너무 오랫동안 진행돼 지식과 정보를 독점했다면, 이제는 ‘정상화’작업이 필요하다. 그게 문화운동이다. 진정한 사회통합은 그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
글/조우석 문화평론가(http://www.goodsociety.kr)
물론 예외적 인물이 벌인 예외적 소동일 것이다. 하지만 사회 주류와 시스템에 대한 한국사회 특유의 적대 심리가 이제는 중장년층에까지 퍼져있고, 식자께나 들었다는 사람도 가리지 않는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미국의 파웰보고서의 지적처럼 "겉으로는 아주 반듯해 보이는 사회구성원들입니다. 즉 대학가, 종교계, 언론계, 지식인, 문학계, 학계, 정계 인사들이 나서서 체제를 비판하고 있는" 상황과 닮은꼴이다. 대선 수(手)개표를 요구하는 황당한 목소리도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른바 ‘18대 대선 부정선거 진상규명 시민모임’ 등이 그들인데, 그들은 한 포털사이트의 청원자 23만여 명의 서명을 모아 재검표 청원서를 제출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개표 부정이라는 음모론 자체가 요즘 같은 세상에 헛웃음이 나올 판이다. 하
지만 중앙선관위 같은 국가기관이 이를 굳이 해명하기 위해 개표 시연을 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시민과 국회 경위가 충돌하는 해프닝도 발생하고, 그게 뭔가 어수선하고 중심이 안 잡힌 우리네의 현주소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소모적인 불신과 논쟁, 불필요한 사회적 분노는 어느덧 우리의 일상이 됐다.
너무도 소모적인 불신과 논쟁, 너무도 불필요한 사회적 분노
이 가운데에서도 충격적이었던 것이 바로 황창규 지식경제부 R&D 전략기획단장(전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 사장)의 서울대 사회학과 초빙교수 임용이 백지화 사건이다. 황창규의 임용을 반대한 분노의 쓰나미에 밀린 그 대학 교수진은 끝내 임용 포기를 해야 했다. 놀라운 것은 학생들의 반대 이유다. 그들은 “사회학이 노동 버리고 자본의 편에 서겠다는 거냐”는 식이다.
세상에 이런 시대착오와 우격다짐이 없다. 사회학의 창시자 막스 베버가 들었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만하다. 더 심한 건 서울대 로스쿨인권법학회 소속 학생들의 시대착오적이고, 뒤틀린 주장이다. “황창규의 전문적 식견이라는 건 노동자의 건강과 목숨을 대가로 이윤을 쥐어짜는 것이다.”
더 희한한 것은 이런 엉터리 주장에 일부 사회학과 대학원생들이 가세하고, 삼성전자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직원의 유족도 참석하면서 사태는 수렁에 빠져든다. 이게 한국사회의 메커니즘이다. 교수 임용이라고 하는 사회적으로 중립적인 사안이 어느 순간 정치사회적 문제로 후끈 비화하고 만다. 이걸 누구도 제지 못한다. 정부, 공권력, 기성세대 등 제도권은 이런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응대는커녕 연신 뒤로 물러서고 만다.
몇몇 사안이 보여주듯 안타깝게도 정치 현안에서 일상의 삶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에는 비정상의 기류가 흐르고 있다. 대선을 치른 뒤 우리는 100% 대한민국과 대통합 그리고 탕평책을 말하고 있지만,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필자가 판단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회통합에 장애� 되는 요소를 지역 갈등, 세대 갈등이란 두세 개 요소로 인수분해하고, 이것만 해결되면 사회통합을 이룰 수 있다지만, 그게 맞는 말일까?
진단이 잘못되면 처방도 엉뚱할 수 있다. 즉 대선 개표부정이란 음모론의 연기를 피워 올리는 집단이 젊은 층인 건 맞지만 노인암살단 이야기를 꺼낸 이는 엄연히 50세였다. 또 이런 종류의 일이 호남지역에 국한해 벌어지는 것도 아니다. 황창규 교수 임용 철회 건에서 드러나듯 서울대를 포함한 사회적 주류의 내부에서도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무엇이 문제일까? 한국사회 최대 문제인 사회통합에 최대 장애는 왜곡된 지식정보 차원의 영역이라고 필자는 규정한다.
지역 갈등, 세대 갈등이란 문제의 표면에 불과하며, 심층에는 훨씬 큰 현안인 왜곡된 지식 정보의 문제가 별도 있다. 한국사회의 책임있는 주류가 벌어야 할 문화전쟁이 겨냥해야 하고, 승부를 내야 할 주력전선도 이쪽이다. 즉 방향 모를 사회적 분노와 적대적 감정, 제도권 전반에 대한 묻지마 증오와 불신은 몇몇 집단과 진영 그리고 세대단절과 지역갈등의 문제가 아니라는 발견이 중요하다.
지역 갈등, 세대 갈등이란 문제의 표면에 불과하다
사실 기존의 표준적 지식과 정보를 엎어버리고, 주류 언론의 정보 유통을 거부하는 흐름은 이미 수십 년 동안 진행돼왔다. 그게 1970년대 민중문화운동이 펼쳐진 이후의 상황이다. 애초 문학 부문에서 시작해 미술, 영화, 연극 부문으로 가치를 쳤고, 이른바 1980년대 학술운동을 거쳐 지금은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자기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작업에 성공했다.
그 결과 춥고 배고팠던 1960~1970년대의 헝그리 사회는 이제 앵그리 사회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게 왜 문제일까? 정부·공권력·기성세대 등 제도권 전반에 대한 묻지마 증오와 불신은 정당한 사회적 분노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 결과 소모적이고 내출혈을 강요하고 있다. 그게 주변부화되고 파편화된 상태로 우리 시대 대중을 오염시켰다는 것도 문제이다.
즉 지식과 정보의 영역 전체에 퍼져있으며, 따라서 문화전쟁 차원의 청소작업이 진행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사회안정, 사회통합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게 이 글의 요지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과연 누가 어떻게 지식과 정보의 왜곡을 만들었을까? 이른바 한국사회 지식문화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좌파가 그걸 만들었다. 때문에 어떤 관찰자는 이렇게 말한다.
“좌파세력은 운동권, 시민단체, 인터넷 매체는 물론 방송, 사법부, 교육계, 공직사회까지 침투해 국기(國基)를 힘들고 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진지는 좌파에서 침투당했다.”(배진영 지음, <책으로 세상 읽기>, 151쪽)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게 좌파에 대한 공격으로 이 파괴적이고 잘못된 흐름이 바로 잡혀질 수 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사안의 심각성은 그 이상이다. 좌파의 진지 점령은 그들은 내몰아낸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물리적으로 그들을 내쫓을 수도 없거니와, 그들이 구축해놓은 지식과 정보라는 거대한 허구의 인프라는 어떻게 재구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이런 지식 정보에 오염당한 젊은이들의 치유 문제도 실로 심각하다. 자신들이 도덕 윤리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자신하는 이른바 좌파들의 비타협적 태도 역시 걱정이다.
즉 좌파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가치와 패러다임이 증오의 역사관이며, 사회적 분노만을 키울 뿐이라는 것을 외면한다. 그들의 잘못된 지식 정보가누적되고 진행될 경우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지적한 쓸모없는 지식, 즉 옵솔로지(obsoledge)의 거대한 잔해로 남을 것이라는 점을 미처 감안하지 않는다. 본래 옵솔로지는 영어 obsolete(쓸모없음)과 지식(knowledge)의 합성어인데, 변화의 속도가 빨라 지식이 못 쓰게 되는 것을 뜻했다.
그게 정보의 홍수로 인해 현상이라면, 한국사회에서는 다분히 정치적 완고함 때문에 빚어지는 비극적 현상이라는 게 다르다.많은 이들은 김대중 노무현 등 좌파정부 10년 사이에 많은 왜곡이 진행되었다고 말하지만, 진실은 또 다르다. 이미 한 세대가 넘는 동안 지식 정보의 편향과 왜곡이 진행되어 왔다. 지금 거론되고 있는 문화전쟁이 세대갈등, 지역 갈등의 차원을 넘어 지식 정보 영역에 손을 뻗어야 할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더구나 이들은 생산(대학교수를 포함한 연구 현장의 실무자 그룹)과 유통(인터넷 포털과 기회주의적 출판계 그리고 전교조) 그리고 소비(젊은 층)로 이어지는 지식정보의 잘못된 유통 사이클을 이미 완성했다.
이것이 거대한 지식정보의 불량 생태계를 형성했으며, 사회통합을 가로 막고 있는 거대한 실체라는 발견이 중요하다. 더욱이 이 지식정보의 생태계는 노장청(老壯靑)이 결합됐다. 대선과정에서 사실상의 선대본부 역할을 했던원탁회의 같은 60,70대 그룹이 앞장 서고, 이들이 중년과 청년 그룹까지 서로 밀어주고 당겨준다. 서로 얽혀있는 공생관계인 이들은 이익집단화 현상도 이미 보이고 있다.
원칙이 살아있는 사회통합이 되려면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문화운동이란 한마디로 대한민국 건국 65년사에 대한 총체적 긍정을 이끌어내는 기초 작업이다. 정부는 물론 시민부문이 함께 손잡고 펼쳐야 될 운동인데, 그것은 한국인들이 경험한 적 없었던 문명사의 대전환 과정인 20세기를 정치적 편견이 없이 바라보도록 유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국가이며,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나쁜 나라"라는, 그동안 주입된 고정관념과 가치관을 치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복하지만 새 정부의 국민대통합위가 해결해야 할 지역 갈등, 세대 갈등이 구조화된 실체는 따로 있으며, 그게 지식과 정보 문제라는 거대한 수면 아래의 문제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그걸 내버려둔 채 지역 갈등, 세대 갈등 양상의 표면에만 주목한다면, 거대한 빙상 아래를 살피지 못하는 어리석음일 뿐이다.
이미 쓸모없어진 시대착오적 지식정보가 사회적 분노와 결합되고, 건국 이래 대한민국 역사의 긍지를 무시하는 게 사회통합을 가로막는 최대 원인인데, 이것은 문화운동을 통해 치유되고 바로 잡혀야 할 대상일 뿐이다. 그것이 원칙있는 사회통합이자, 제대로 전개되어야 할 문화운동의 전개 원칙이다. 이명박 정부도 나름 사회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명분 좋은 화합과 포용을 기치로 내세웠고, 틈만 나면 공정사회 구호를 외쳤던 그들은 2008년 광우병 파동에서 결정적으로 외상(外傷)을 입었으면서도 아니 그런 척을 했다. 외려 다 모두를 끌어안겠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하지만 그건 대범함과 포용이 아니었고, 겁먹은 것에 불과했다.
억지웃음 속에 끌어안는 척을 했지만, 지역 갈등, 이념 갈등, 세대 갈등의 상대방 쪽 진영은 그런 수를 죄다 읽고 있었고, 등 돌린 채 냉소를 보냈다. 정부 쪽은 겨우 대통령 산하 사회통합위원회를 만들었고, 좌파 성향의 인사를 사회통합수석비서관으로 기용했지만, 상황이 바뀐 것은 없다. 새로 들어선 박근혜 정부가 100% 대한민국과 대통합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달라야 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어쩌면 정부에 못지 않게 시민부문에서 나서야 할 지 모른다. 사회통합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유지와 사회적 합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자본 형성을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파웰 보고서에도 나오지만, 사회적 분노를 증폭시켜 정치적 이익을 챙기려는 세력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법이다. 이게 너무 오랫동안 진행돼 지식과 정보를 독점했다면, 이제는 ‘정상화’작업이 필요하다. 그게 문화운동이다. 진정한 사회통합은 그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
글/조우석 문화평론가(http://www.goodsociet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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