從北도 '스펙'인 사람들 (조선/ 131109)
신동흔 여론독자부 차장
"앞으로 통일된 세상이 오면, 형은 후회할지도 몰라. 경력에 큰 '오점'을 남긴 거니까."
16년 전 신문사에 입사할 때 운동권이었던 한 후배가 나를 두고 한 말이다. 면전에선 아니고, 훗날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 들었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통일된 다음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꽤 '세속적' 사고방식이었다. '운동권도 경력 같은 걸 생각하는구나….' 낯설었다.
대학을 졸업하던 무렵 누구나 진로가 고민이었다. 열렬했던 투사가 어느 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공부에 관심 없는 줄 알았던 친구가 도망치듯 해외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그리고 대부분은 어떻게든 일자리를 찾아 이 사회의 한 자리로 비집고 들어갔다.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중략)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 두려웠다'(기형도,'대학시절')로 끝나는 시가 널리 읽혔지만, 실제론 모두 '떠나'갔다. 일종의 성장통(痛)이 있었을 뿐, 요절한 시인처럼 그 시절에 남아있을 순 없었다.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 것은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때문이었다. 그가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그와 주변 사람들이 '종북(從北)'을 무슨 경력 삼아 사회에 진출한 점이 놀라웠다. 그는 기획사를 차려 놓고 대학가 행사 등을 대행해주며 돈을 벌었고, 친환경 급식 회사를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받아 지자체 지원까지 받았다. 이들이 세운 한 청소대행업체는 이석기와 경기동부연합 관계자들이 대표이사와 임원을 나눠 맡았다. 이들은 '청년백수'를 비웃기라도 하듯 직장 활동과 RO(혁명 조직) 활동을 병행했다. '운동권이 사회에서 유능할 수도 있구나….' 이상했다.
행여나 구직(求職)을 위해 RO 조직원이 된 사람은 없었을까. 다단계에 빠져 '대박'을 꿈꾸는 '거마대학생'(서울 거여·마천동에 다단계 합숙소가 많아 생긴 말)처럼 어떤 이들은 회사가 대박 나기를 바라며 '통일'을 염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다단계 조직과 RO는 '학습'을 많이 하는 점이 무척 닮았다. 경기동부연합이 민노당 지구당을 접수할 때처럼 특정 주소에서 수십 명이 '합숙'하는 것도 비슷하다.
슬그머니 제도권에 들어와 있던 것은 이들뿐만이 아니다. 법원에선 종북 사이트의 글을 퍼다 나르던 노조 간부들이 적발됐고, 김일성 묘소 참배자에게 "동방예의지국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한 판사까지 나왔다. 나에게 이들의 행동은 남한에서 국회나 법원에 들어가 기득권을 누리면서 혹시 나중에 그게 경력에 오점이 될까 봐 일종의 '알리바이(현장 부재 증명)'를 남기려는 행태로 보였다. 최근에는 남에서의 종북 활동을 북이 인정해주리라 기대하고 국경을 넘었다가 쫓겨난 이들까지 생겨났다. '이렇게 세속적 이유로 월북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당혹스러웠다.
엊그제 통진당에 대한 해산 심판 청구 소송이 제기됐다. 이제야 정상으로 돌아오는 느낌이다. 우리 사회의 제도적 허점을 이용해 개인적 영달과 종북적 신념까지 충족시키는 '종북 속물'들이 히죽거리는 모습을 더 이상 보기는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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