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잡지 '가요생활' 1967년 3월호에 실린 특집기사를 옮긴 것입니다. 강사랑-고복수-신카나리아-이인권-손목인 등 여러 동료들이 남인수님에 관한 추억담, 일화 등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별로 나누어 연재하겠습니다/ 남인수팬클럽 회보 제5호(2003/05)~제6호(2003/07)
아아! 남인수, 그 숱한 일화들
내가 아는 남인수/강사랑
제법 태양이 따가워졌고 가로수 잎사귀들이 자못 푸른 색으로 짙어 가던 5월의 그 어느 날이었다.
여기는 '남대문로'가 내려다 뵈는 '오케레코오드'회사 2층, 문예부 창가다.
금단추 제복에 기름도 바르지 않은 덥수룩한 머리, 얼른 보아서 운동선수와 같은 인상의 강문수가 지금 전속 계약을 하려는 참이다.
그와 나는 동성인 데서 얼른 친해질 수 있었으며 서로 외로운 처지라는 데서(둘 다 독자였다) 또한 형이 되고 아우가 되는 정이 통했으며 나는 그 때 그 계약서에 강문수의 보증인으로 도장을 찍었고 그로부터 우린 30년 동안 육친과 같이 지내 왔던 것이다.
그는 그 해 9월에 '사랑도 싫드라 돈도 싫어'와 '범벅서울'의 두 곡의 신보를 냄으로써 가수 남인수로서 탄생되었던 것이니 이것이 바로 1936년 9월달이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이오 그가 가수로 출발해서 1962년 6월 26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꼭 가수생활 27년이 되는 셈이오 그 때 그는 마흔 여섯(46세)이 됐던 것이다.
가수생활 27년! 근 3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정상에서 정상으로 인기의 최고 정점을 그대로 유지해 내려온 가수가 그 외 또 누가 있었던가? 아니 앞으로 또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이 말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다. 그와의 '콤비'로 많은 '힛트'를 낸 작곡가 박시춘형이 그의 죽음을 당해 철야하던 밤 그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으로서의 술회담이었다.
그가 운명하기 이틀 전인 24일 난 위독하다는 급전을 받고 대구에서 부랴부랴 밤차에 올랐던 것이다. 25일 새벽, 차에서 내리기가 바쁘게 충무로 5가로 달려갔을 때, 남인수는 이미 의식을 잃고 몽롱해서 잘 알아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형 왔오" 하며, 반색을 할 그가 초점을 잃은 안광으로 허공만 두리번 거리고 있었으며 꼭 잡은 손목의 감촉도 느끼지 못했었다.
나는 30년간 친교가 있었고 스승이오 또 벗이며 연예협회라는 단체를 통해서는 이사장이오 부이사장이란 인간관계 등을 고려해서 박시춘형에게 전화 연락을 했고 또 차중에서 생각한 대로 만일의 경우 연예장으로 할 것을 말하고 오후에 만나기로 했었다.
그날 오후 박시춘형을 만났을 때 박형은 "평소 남인수가 대인관계가 좋지 못하니 여론이 달갑지 않아 연예장은 어려울 것"이란 말이었다.
나는 즉석에서 "물론 박형과 나와 남인수와의 친교관계로 보아 개인적이다 정실이다라고 오해할지 모르나 그야말로 곡해의 곡해요 문제의 올바른 견해가 되지 못하는 것일세! 사람은 누구나 다 잘못은 있고 또 그 처세에 있어 전부면 전부의 호감을 살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것 보다 명분은 딴 데 있잖은가, 즉 우리 가요계에 30년 동안 뚜렷한 공적을 남긴 가수의 마지막 길을 장식해 준다는 것, 얼마나 떳떳한 일이며 나아가 삭막하기만한 연예계에 그 얼마나 우정의 꽃 그리고 동지애의 훈풍을 불러일으킬 것인가? 뿐이겠는가. 그의 마지막 길에 꽃다발을 안겨 준다는 의의는 물론 남은 우리들에게 사회적으로 보내 주는 박수나 성과는 적잖을 걸세. 공명심에서가 아니라 해 보세 결과가 어떤가" 하는 것이 나의 명분론이었다.
그 다음날인 26일, 긴급이사회는 열렸고, 회의 도중 그의 운명이 경각에 달했다는 기별이 전해져 왔고 그리고 하오 2시 정각 그는 운명을 했고 그래서 전체 연예인들은 뜨거운 동지애로서 '연예장'으로 각계의 박수와 찬사를 받으며 장송곡 아닌 '애수의 소야곡'의 구슬픈 주악 아래 그의 마지막 길을 슬픔과 애도로 보냈던 것이다.
과연 그는 '인색'했던가?
나는 여기서 그 당시 있었던 말 즉 대인관계에 있어 여론이 좋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저분한 얘기로서 해명해 보련다.
그 좋지 못한 여론이란 첫째 금전 관계에 있어 '인색'하다는 것과 여자 관계에 있어 말썽이 자졌다는 것으로 집약될 줄로 안다.
그럼 첫째, 돈에 인색했다는 점에 대해서다. 참 웃으운 얘기다. 도대체 남인수가 '술을 안 샀다'는 얘긴가 "밥을 안 샀단 얘긴가" 그럼 '돈을 꿔 주지 않았단 얘긴가' '꿔 간 돈을 잘라 먹었다는 얘긴가' 도시 그 정체를 모르는 일이었다.
얼른 말해서 그의 30년의 가수생활이란 한편에 있어선 투병생활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학창시절에 단거리선수요 '복싱'도 했다고 했었다. O.K에 입사해서만 해도 오후면 출하부 마당에서 각부 대항 배구 운동이 곧잘 벌어지고 했는데 그럴 때면 남인수는 문예부의 '센타'로 민첩하고 날세었다. 그러던 그가 입사 3년만에 폐를 앓았던 것이다.(아마도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술과 여자, 여기서 그의 방종한 생활이 그렇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가 스물 두 살 때 평양 금천대좌에서 공연 중 무대에서 각혈을 한 것으로 그의 장구한 또 지긋지긋한 정양생활 투병생활이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에게 보통사람과 같이 정상적인 처세를 요구한다는 건 무리다.
병자는 병자로서의 생활 태도가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절도 있는 생활을 했어야 했고, 안정해야 했고, 약을 써야만 했다.
먹고 뛰고 노는 사람들이 한없이 부럽기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건강해야 했고 건강하기 위해선 약을 찾아 동으로 가야 했고 의사를 찾아 서로 가야만 했다.
명약이라면 비바람도 무릅써야만 했고 명의라면 눈보라도 헤쳐야 했다. 입에 맞는 음식 몸에 이로운 음식을 골라야 했던 것이니 이 모두가 '돈'이었고 '돈'으로서만이 그의 건강은 아니 그의 수명은 지탱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앓아 누었을 때 머리맡에 돈을 수북히 놔둬야 빨리 병이 쾌차해지는 것이며 그렇지 않고 쪼달릴 때면 곧 죽을 것만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돈'으로 연명해 가는 사람을 '돈'에 인색하다고 하면 그럼 그에게 부모의 유산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그럼 또 어떤 횡재라도 있었단 말인가?
그는 남달리 고단하면서도 쿨룩거리며 무대에 서야만 했고 노래를 불러야만 했다. 그래서 얻은 돈으로 우선 약값을 써야 했고 먹고 살아야 했고 또 먹여 살려야 할 사람들을 돌봐야 했다. 하루나 이틀이 아니요, 한 달이나 두 달 또는 일 년이나 이 년에 끝났던 생활이 아니다. 20여 년 근 30년에 가까운 얘기다. 보통 사람이 해낼 수 없는 일을 인내와 의지와 절도 있는 생활로서 자기 수명을 지탱해 나가는 이 사람을 누가 인색한 사람이라고 했던가?
남인수는 벗들과 어울려서 차나 음식을 하게 되면 으레 자기가 내기 마련이다. 이유인 즉 자긴 선배격이 되며 또 정도도 좀 나은 편이니 내야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였다. '캬라'도 남들의 몇 갑절이나 받을 수 있었기에 말이다.
그렇기에 어려운 동지들이면 기만원쯤 준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난 내 손으로 남인수의 부탁을 받고 전한 일이 있으니 말이다.
혹시 '캬라'같은 걸 떼 먹혔단 얘기는 들었어도 떼 먹었단 얘기는 못 들었다.
그럼 그가 왜 그런 비난을 받아야 했던가? 그는 너무나 영리하고 찬찬하다 꼬치꼬치 따지고 덤빈다. 따지고 덤빌 땐 그의 말솜씨에 당해낼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런 것들이 심히 못마땅한 것이다. 좀 어수룩한 점도 있어야 부칠 맛도 있겠는데 하나에서 열까지 빈틈이 없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성격이나 처세에서 인색이란 '렛델'이 붙게 된 것인가?
친구가 용돈이 궁할 때 일일이 세는 것도 아니고 그저 덥석 빼 주는 일면도 있는 그가 한푼이라도 어긋날 땐 콩이야 팥이냐 하고 따지고 든다. 극단에서 극단이다.
그것이 본성인가 후천적으로 오랜 병생활에서 가져온 '괴벽'인가는 모르나 앓아 누었을 때의 '괴벽'은 옆사람들이 말라들어 갈 정도였기도 했다. '돈인수'란 '별명'이 붙게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겠지만 흥행가들이 만들어낸 이 '돈인수'란 '닉네임'도 당시의 흥행계의 생태나 흥행사들의 생리를 정당히 이해하는 사람들이라면 적반하장격인 '별명'이었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캬라'는 정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고 받게 되는 것이 문제'였다. 흥행이 안되면 으레 잘라 먹을 작정이다. 여기 남인수는 악착같다. 바른대로 손해가 왔다면 하루나 이틀쯤 무료로 출연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한 한번 정한 자기 예술의 대가를 귀중한 노동의 대가를 어수룩한 술수에 너무 잘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빈틈 없고 악착같다. 그런 데서 흥행사들은 자기 속셈을 정당화시키려는 간교에서 만만찮은 남인수를 '돈인수'라 꼬집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흥행사들은 남인수를 멀리할 수는 없었다. 남인수를 출연시켜서만이 흥행의 안전도가 보장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몇 배의 '캬라'를 주고라도 써야만 했다. '참으로 미워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다.
이유가 이쯤 되고 보면 그 '돈인수'란 별명의 정체에 대해 그 얼마나 흥행사들의 뱃속이 검었던가 다시 한번 적반하장이란 격언이 생각나는 얘기다.
남인수는 '코메디'를 퍽 좋아했다. 8,9년 전이라고 생각되는데 서영춘씨를 일반 무대에 처음 세운 사람이 바로 남인수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게 바로 부산극장 무대다.
그 후 한 2개월 동안 같이 지방순회를 했는데 서영춘씬 귀를 몹씨 앓았다. 적은 '캬라'로 일일이 치료비를 충당치 못한 서씨에게 남인수는 매일 300원씩 주어 치료를 시킨 것으로 안다.
그만큼 그는 '코메디'를 좋아했고 '코메디언'을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구봉서씨와 서영춘씰 퍽 좋아했다. 이 분들이 '코메디'를 할 때면 으레 막 사이로 내다보며 즐긴다. 그리고 끝내고 나오면 "어이 봉서, 거긴 이렇게 하면 어때, 어이 영춘이 그 대목 말이어 이렇게 했으면 좋지 않어" 열심이다. 오늘날 구봉서씨나 서영춘씨가 유명해졌다면 남인수의 이런 조언이 일부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은데 아마 이 점은 본인들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남인수, 그는 '유모어'를 좋아했고 풍류를 알고 있었다. 재주가 비상하여 '놀이'란 '놀이'는 못하는 것이 없었다.
'유모어'를 즐기고 풍류를 아는 사람으로 나쁜 사람은 없다.
'사촌 논 사면 배 아프다'는 격으로 그의 인기에 대해 그의 수입에 대하여 시기나 질투가 없었던가?
그의 지나친 똑똑함이 경원되어졌고 심해서 비난을 받았던 것이 아닐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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