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우리의 가슴을 흐른다면 - 이근화(1976∼ )
날이 흐리다
곧 눈이 흩날릴 것이고
뜨거운 철판 위의 코끼리들처럼 춤을 추겠지
커다랗고 슬픈 눈도 새하얀 눈발도 읽어내기 어렵다
저 너머에만 있다는 코끼리의 무덤처럼 등이 굽은 사람들
시곗바늘 위에 야광별을 붙여놓은 아이는 아직 시간을 모른다
낮과 밤을 모르고
새벽의 한기와 허기를 모른다
별을 비껴 부지런한 시간을 바늘이 달린다
반짝이는 것에 기대어 말할까
별이 우리의 가슴을 흐른다면 속삭여볼까
(중략)
오늘밤 붙박인 사람들은 작은 손을 모은다
물에 잠긴 수도원을 서성이는 발걸음은
무의미하다
최선을 다한 기도처럼
차가운 창밖을 부지런히
성의껏 달리는
흰 눈송이들
잿빛 세상을 다독이려는 듯이
눈발이 굵어진다
어린애들은 성탄절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그 마음은 복되어라. 연인이 생기면 성탄절을 기뻐한다. 기뻐하는 그 마음은 사랑스러워라. 그런데 세상을 꽤 살아낸 성인이 되면 성탄절이 좀 서글프다. 오래전 모든 죄를 짊어지기 위해 태어났다는 아기를 생각하면 마음이 찡해진다. 그 아기 말고도 우리 모두가 아기였다는 사실과, 우리도 삶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 찡해진다.
오늘은 전혀 달콤하지도 않고 설레지도 않는, 어른들의 성탄절을 위해 시를 읽는다. 이 시는 흐리고 추운 겨울날 시작된다. 추위 때문에 사람들은 움츠러들고, 한기와 허기 때문에 마음은 더 움츠러든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우리의 마음에 흐르는 별, 간절히 기도하는 손, 그것을 다독이는 흰 눈. 자세히 보면 이 시에는 잿빛 우울을 밝히는 작은 빛들이 등장한다.
언제고 절망은 크고 희망은 작지만 우리는 절망에 지면서도 자꾸만 희망에 시선을 빼앗긴다. 희망은 반짝이니까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의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이 시가 선물처럼 당신을 기다린다면 좋겠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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