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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김수호-동아행복시/나민애♧시깃든삶-15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까치밥 - 서종택(1948∼ ) [동아/ 2022-12-03]

설지선 2022. 12. 3. 10:19



      까치밥 - 서종택(1948∼ )




      우리집 앞마당에는 까치들이 버리고 간 늙은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그 쓸쓸한 감나무 가지 사이로 바람이 한 줄 한 줄 불어와서는 마당 한구석에 조그맣게 웅크리고 앉아 있으면, 햇살은 가득하게 내려오면서 감나무 속으로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남은 햇살은 감나무 그림자 가에 모여서 나와 함께 하루 종일 놀았습니다.

      외롭고 슬픗할 때면 감나무 아래 기대 앉아서 저문 햇빛 수천 그루 노을이 되어 아득하게 떠가는 것 보았습니다. 흐르는 노을 그냥 보내기 정말 싫어서 두 손을 꼭 잡고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깜박 밤이 되면은 감나무는 하늘 위로 달을 띄워서 하늬바람 가는 길 내어 주지요.

      사람들이 사는 곳 어두운 빛은 그만큼 밝았습니다. 세상은 달빛 속에 잠들어 가고 달빛 또한 세상 속에 잠들어 갈 때, 나는 감나무 가지 끝 까치밥 몇 개 글썽이는 눈으로 보았습니다. 어머니께서 따지 않고 남겨 두어서 하늘까지 올라간 까치밥 몇 개, 외롭고 슬픗한 지난 한 해를 사무치도록 아름답게 간직했어요.




꽉 차 있는 시다. 여기 들어 있는 것들을 하나씩 꼽아 본다. 아름다운 문장이 있고, 감나무와 햇빛과 노을이 있다. 하늘의 눈인 달이 떠 있고, 화자도 글썽이는 눈을 뜨고 있다. 하늬바람과 까치밥도 빼놓을 수 없다. 이렇게 있는 게 많은데 없는 게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소리다. 여기에는 말소리, 그러니까 대화가 없다. 시에서 청각 이미지라고 부르는 것도 없다. 소리가 없는 세상이지만 아쉬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의미를 담는 언어는 아주 다양한데 우리는 종종 언어가 곧 소리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런데 몸짓 언어도 언어고, 눈빛 언어도 언어고, 마음 언어도 언어다. 소리 있는 언어는 입에서 귀로 흐르지만, 소리 없는 언어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흐른다. 때로는 말이 되지 않은 언어가 더 진정성 있는 법이다.

이 시에는 소리는 없는데 비음성적 언어, 그러니까 마음에서 마음으로 흐르는 언어가 가득하다. 어린 화자는 감나무의 말을 듣고, 노을과 대화하며, 달빛과 감응한다. 이제 시가 꽉 찼다고 느껴지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여기에는 아주 많은 대화가 들어 있다. 노을과 감나무와 하늘과 까치밥이 얼마나 많은 말을 할 수 있는지 우리는 너무 오래 잊고 살아왔다. [나민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