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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김수호-조선가슴시/최영미♣어떤 시

[최영미의 어떤 시] 약속 (Promise) - 재키 케이 (Jackie Kay 1961~) [조선/ 2022-01-03]

설지선 2022. 1. 3. 11:13

[최영미의 어떤 시] 약속 (Promise) - 재키 케이 (Jackie Kay 1961~) [조선/ 2022-01-03]



 

    일러스트=양진경




    약속 (Promise) - 재키 케이 (Jackie Kay 1961~)

    기억하라, 한 해의 이맘때

    미래는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백지(白紙)처럼 보이고

    깨끗한 달력, 새로운 기회.

    두텁게 쌓인 하얀 눈 위에

    너는 새로운 발자국을 맹세한다

    그리고 세찬 바람이 불어

    그것들이 사라지는 걸 지켜보지

    너의 잔을 채우고, 한잔 마셔라

    약속들은

    부서지고, 지켜지라고 만들어졌지


약속은 깨어지라고 존재하는 것? 상식을 뒤집는 결구가 왜 이리 시원한지. 따뜻한 바람이 불어 한순간 녹아내리는 눈덩이처럼 허망하게 부서지더라도 약속은 계속되어야 한다.

약속이라는 말이 이처럼 무겁게 반짝거리는 시를 보지 못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를 새롭게 정의하는 시인의 능력에 감탄사가 나올 수밖에. 재키 케이는 에든버러에서 태어난 여성 시인. 스코틀랜드 어머니와 나이지리아 출신의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어릴 적 백인 부부에게 입양되어 자랐다.

새해를 맞으며 새로운 다짐을 하지만, 다짐은 다 짐이 되지 않던가. 달력이 없다면 이 지루하도록 긴 생을 어이 살았을까. 우리 앞에 놓인 시간을 일 년 365일, 하루 24시간으로 쪼갠 인류의 지혜에 건배를! 아무리 비천한 인생이라도 새해 첫날이 있어 해마다 새로 시작할 수 있으니. 세찬 바람에 표류하더라도 산다는 이 일을 포기하면 안 되리.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