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노래와 할배 자세히보기

2-1 김수호-동아행복시/나민애♧시깃든삶-15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인중을 긁적거리며 ― 심보선(1970∼) [동아/ 2021-08-28]

설지선 2021. 8. 28. 09:26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인중을 긁적거리며 ― 심보선(1970∼) [동아/ 2021-08-28]






    인중을 긁적거리며 ― 심보선(1970∼)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배 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술 위에 인중이 생겼다. (중략)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이 시는 세로 20.5cm, 가로 12.5cm의 시집 속에 들어 있다. 대개 시집의 판형은 책 중에서도 좀 작은 편이다. 그중에서도 네 페이지 빼곡하게 이 시는 적혀 있다.

시집의 크기는 두 손바닥으로 가리면 다 가려진다. 그와 비슷한 크기, 그러나 우리가 더 자주 가리는 것 중에 얼굴이 있다.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쌀 때는 혼란스럽고 괴로울 때다. 그럴 때는 손바닥 안으로 도망치지 말고, 얼굴을 감싸던 손을 들어 시집을 열어 보는 것도 좋다. 시인의 언어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사는 것이 퍽퍽할 때, 타인 때문에 힘들 때, 사실은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 때문에 힘들다는 것을 직감할 때 나는 이 시가 알려주는 비밀에 기대어 위로를 받는다. 시인은 우리 인중이 천사의 손가락 모양이라고 알려준다. 쉿, 다 잊고 다시 시작해. 이런 운명의 자국을 보고 있자면 자잘하게 흔들리는 마음은 좀 진정된다.

손을 들어 잊었던 인중을 다시 한 번 쓸어본다. 천사의 약속과 지워진 이야기가 담겨 있다. 눈을 들어 마주한 사람의 인중을 바라본다. 우리는 같은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이구나 싶어 미워할 수 없다. 세로 20.5cm, 가로 12.5cm의 세계는 참 놀랍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인중을 긁적거리며 (전문)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뱃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술 위에 인중이 생겼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끌리는 이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은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여인일 뿐이라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라고 믿어왔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보니, 로 시작해서 어쩌다보니, 로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쩌다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추락하는 나의 친구들:
    옛 연인이 살던 집 담장을 뛰어넘다 다친 친구.

    옛 동지와 함께 첨탑에 올랐다 떨어져 다친 친구.
    그들의 붉은 피가 내 손에 닿으면 검은 물이 되고
    그 검은 물은 내 손톱 끝을 적시고
    그때 나는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다는 듯
    인중을 긁적거리며
    그들의 슬픔을 손가락의 삶-쓰기로 옮겨온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
    삼일, 오일, 육일, 구일……
    달력에 사랑의 날짜를 빼곡히 채우는 여인.
    오전을 서둘러 끝내고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기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기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죽음,
    기억 없는 죽음, 무의미한 죽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일랑 잊고서
    인중을 긁적거리며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뿐인 청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