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곳간 열쇠를 쥔 쪽에 투표… 선거 결과에 유권자가 가장 많이 놀라" - 최보식 선임기자 [조선/ 2020.04.20]
보수는 왜 대패했나… 전병민 前 청와대 정책수석
막말 파문은 영향 크지 않아, 통합당의 미숙한 대처가 문제… 선거 막판에 뉴스를 더 키워
황교안, 늘 하나 마나 한 말을 해
홍준표, 독불장군 리더십 고쳐야
안철수, 심판 받을만큼 받은 사람
"유권자들도 표를 던졌지만 이런 선거 결과가 나올 줄 몰랐을 것이다. 가장 많이 놀란 순서로 보면 첫째가 유권자이고, 그다음으로 야당일 거다."
한때 '킹메이커'로 불렸던 전병민(74)씨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1987년 '1노 3김'이 출마한 대선 때 그는 노태우 후보의 비선 선거 조직에서 활동했다. 1992년 대선에서는 '동숭동팀'을 운영해 김영삼 당선에 일등 공신이 됐고, YS 정부의 개혁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청와대 정책수석에 임명됐지만, '송진우 선생의 암살에 장인이 연루됐다'는 야당과 언론의 공세로 사흘 만에 물러났던 인물이다. 박근혜 후보의 선거에도 잠깐 관여한 적 있다.
▲ 전병민씨는 "보수는 패배주의에 빠질 이유가 없고 기회는 온다"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
돈 앞에 장사 없다
―한 저명 선거 전문가는 "역대 선거 데이터 분석을 통한 예측이 이렇게 크게 빗나가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선거 여론조사도 모두 틀렸다. 출구조사조차 허용 오차 범위를 훨씬 벗어났다. 이 충격적 결과에 대해 다양한 사후 분석이 나오고 있는데?
"한마디로 '돈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을 것이다."
―무슨 뜻인가?
"코로나 사태로 서민들은 먹고사는 문제, 자신이 언제 길바닥에 나앉을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나 자치단체에서 내미는 긴급재난지원을 쳐다볼 수밖에 없다. '코로나 쓰나미'에 편승한 정부·여당의 돈 공세가 승패를 갈랐다는 게 내 판단이다."
―야당도 막판에 온 국민에게 50만원씩, 대학생에게는 재난장학금을 얘기하지 않았나?
"곳간 열쇠를 쥐고 있는 게 정부·여당이다. 야당이 많이 당선되면 브레이크를 걸어 정부 지원이 깎이거나 지연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실제 야당 일각에서는 이를 포퓰리즘으로 공격하지 않았나."
―정부 재정은 한정돼 있고, 코로나 사태로 갑자기 소득이 끊긴 자영업자·소상공인 등부터 선별 집중 지급하자는 취지였는데?
"미국·유럽 등에서도 돈을 퍼붓고 있으니, 재난 상황에서 이를 포퓰리즘으로 공격하기 어려워졌다. 현 정권으로서는 선거를 앞두고 합법적으로 돈을 뿌려도 될 유리한 환경을 맞은 것이다."
―50대 이상 투표율이 높았다. 과거 같으면 보수 정당 지지표였다. 정확한 분석은 안 됐지만 이번에는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세대별 투표 성향은 이번에 의미가 없어졌다. 생존 문제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워낙 공포감이 강한 데다 경제적으로 절박했다. 곳간 열쇠를 쥔 쪽을 찍을 수밖에 없었을 거다. 모든 선거 전문가의 예측이 빗나간 것은 코로나 경제난과 돈 뿌리기의 강력한 힘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이는 유권자들에 대한 사후 조사로 입증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설령 조사해봐도, 명분과 체면을 중시하는 국민 의식으로 볼 때 '돈 때문에 찍었다'고 답변하진 않을 것이다."
―야당이 국민에게 신뢰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지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야당이 잘했으면 조금 덜 졌겠지만, 큰 흐름을 바꿀 수는 없었다."
―차명진 후보의 '세월호 막말' 파문이 사전 투표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있는데?
"얼마간 영향을 미쳤겠지만, 막말 때문에 개헌선에 가까운 몰표를 여당에 줬다고 보지 않는다. 나는 통합당의 대처 방법이 잘못됐다고 본다. 파리를 잡는 데 도끼를 휘두른 격이었다."
―통합당이 오히려 펌프질을 해서 선거 막판에 뉴스를 더 키웠다는 뜻인가?
"아마 민주당이었으면 '진의가 왜곡됐다' '유권자가 심판할 것'이라고 배짱 좋게 밀어붙였을 것이다. 실제 여당 후보의 막말과 도덕성 문제에 그렇게 대응했다. 하지만 통합당은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투표를 앞두고 제명 절차 소동을 벌였다."
―명색이 후보자라면 말에 품위가 있어야 한다. 차명진이 당 전체 이미지에 타격을 줘 중도층을 등 돌리게 한 게 아닐까?
"반면에 당의 미숙한 조치로 보수 지지층이 떨어져나간 측면이 있다. 차명진은 그동안 '좌파가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왔다'고 주장해온 사람이다. 당에서 그를 공천해놓고는, 그런 발언으로 표 떨어진다며 막판에 제명 조치한 것은 코미디에 가깝다. 박근혜 탄핵 직후 문재인은 팽목항에 가서 방명록에 '미안하고 고맙다'고 썼다. 그런 게 정말 막말인데 대통령에 당선됐다."
―야당의 완패에는 공천 실패도 크게 작용했다. 야당은 공약 1호로 '탈원전 폐기'를 내세웠지만, 탈원전에 맞서 싸우던 활동가나 전문가들을 모두 공천 탈락시켰다. 여당에서는 탈원전에 앞장선 후보가 여럿 당선됐다. 또 국방 전문가로서 의정 활동이 돋보였던 백승주 의원은 계파 나눠먹기에 의해 컷오프됐다. 반(反)문재인 구호와 한 표 달라는 읍소 외에 보수 정당다운 가치와 철학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황교안 대표나 김형오 공관위원장이 이런 문제의식이 없었다는 게 안타깝다."
―수도권에서 민주당 후보 득표율은 54%, 통합당은 41%였다. 의석수로는 103석 대 16석으로 큰 차이가 났다. 이는 후보 공천을 잘못했다는 증거다. 경쟁력 있는 후보를 빼내 전혀 연고나 기반이 없는 지역구로 보낸 경우가 꽤 있었다. 가령 서울 험지인 양천을에서 3선을 한 김용태를 전략공천 명목으로 구로을에 가서 싸우게 했다.
"지역 주민을 무시하는 듯한 공천이었다. 지역 선거인 총선에서는 후보의 연고와 조직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세상과 인간에 대해 고민해본 사람
―반면에 같은 지역구에서 여당에 계속 져서 더 이상 경쟁력 없는 걸로 판명된 전직 의원들을 그대로 공천했다. '물갈이'를 내세우면서 그렇게 했다.
"이들을 대신할 인물이 없었을 것이다. 정치는 한마디로 '사람 장사'다. 황교안이 가장 비판받아야 할 점이 총선을 1년 앞두고 좋은 인재들을 전혀 끌어모으지 못한 것이다."
―수도권 험지 출마를 안 받아들였다고 전직 당대표인 홍준표를 컷오프했다. 홍준표는 영남선대위원장을 맡아 경남 양산을에서 대선 주자급인 김두관과 맞붙겠다고 했다. 타협안은 충분히 받아들일 만했다고 본다. 세간의 눈에는 황교안이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를 공천으로 날려버린 것으로 비쳤다.
"수도권 험지에서 싸워 달라는 요청은 정당했다고 본다. 하지만 세간에서는 잠재적 경쟁자를 사전에 교통정리하려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황교안은 말로는 통합과 대의를 내세우면서, 정작 선거에서 김무성·김문수의 역할을 배제했다.
"본인으로서는 할 얘기가 많겠지만, 리더십에 문제가 많았다. 사람을 자기편으로 끌어오는 기술이 너무 부족했다. 자기 사람이 아니어도 자기가 쓰면 자기 사람이 되는 것이다."
―황교안을 만나보니 '자기 언어'가 없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해 제대로 고민해본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최악의 위기 상황에서 황교안을 지도자로 세운 것도 보수의 운명인지 모르겠다.
"그는 청와대와 여의도의 언어, 여당과 야당의 언어가 다르다는 걸 모르더라. 늘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했다. YS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한마디로 민주화 시기를 버텨냈다."
―말로는 홍준표를 따라갈 야당 정치인이 없다. 하지만 그에게는 오히려 거친 말이 족쇄가 되는데?
"홍준표는 말 센스가 뛰어나지만 비난과 비판을 구별 못 해 욕먹는다. 비판을 잘해야지 비난을 해서는 안 된다."
―심재철·나경원·오세훈 등 대선 주자급 중진 의원들이 날아갔다. 보수 정당은 유능한 인적 자원이 많다는 걸 그동안 내세워왔지만, 이제는 인물난을 맞게 됐다.
"제일 아까운 인물이 나경원 의원이다. 비정상적 선거에서 졌다고 완전히 퇴장시킬 것은 아니다. 훌륭한 인재들이 많아야 대안(代案) 정당이 될 수 있다. 최근 10여년 동안 친이(親李)가 들어서면 친박(親朴)을 쳐내고 친박이 들어서면 친이를 쳐냈다. 박근혜 탄핵으로 또 갈라졌다. 이런 과정에서 인재들이 길러지지 못했다."
―이번 야당 패배를 더 이상 보수가 이길 수 없는 정치 지형의 변화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그건 착시 현상이고 잘못된 분석이다. 보수층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코로나 쓰나미'와 돈 뿌리기라는 아주 불리한 상황인데도 정당 득표수에서 100만표를 졌다. 보수는 너무 패배주의에 빠질 이유가 없다."
―2년 뒤 대선을 어떻게 보나?
"총선 패배가 대선 패배로 연결되지 않는다. 보수 정당이 네 차례 연패하면서 여기까지 왔으니 바닥을 쳤다. 이번 총선에서 어쨌든 친박·친이 문제가 어느 정도 정리돼 당 내부 환경도 좋아졌다."
정치를 잘 아는 경제인이 후보감
―대부분 암담한 전망을 내놓는데, 무슨 근거로 자신하는가?
"현 정부는 앞으로 2년 동안 경제 재난 불 끄기에 급급할 것이다. 동원 수단은 지금까지 해왔듯이 나랏빚을 내서 메워가는 식이 될 거다. 본격적인 복구 작업은 차기 정부의 과제가 된다. 현 정권의 경제정책을 지켜봤던 국민이 경제 재건 프로젝트를 또다시 이 세력에게 맡기려 할까. 이 지점에서 보수 정당에 기회가 있다고 본다."
―홍준표나 유승민에게 대권 기회가 있다고 보나?
"한번 평가받았던 인물로 표의 확장성에 한계가 있다. 홍준표는 독불장군 리더십을 고쳐야 한다. 대통령은 팀플레이로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다. 유승민은 판단이 너무 신중하다 못해 답답한 느낌을 준다. "
―안철수를 보수 정당 간판으로 내세우면?
"안철수는 그동안 '보수당과 절대로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해왔다. 이번 총선에서 입지가 축소됐다고 그가 통합당으로 올까. 한편으로 그는 심판을 받을 만큼 받은 사람이다."
―선생이 생각하는 대선 후보는?
"정치를 잘 아는 경제인과 안보를 잘 아는 정치인이 각각 대통령과 총리를 맡는 조건으로 러닝메이트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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