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아버지 자랑 ― 임길택(1952∼1997) [동아/ 2016-12-16]
아버지 자랑 ― 임길택(1952∼1997)
새로 오신 선생님께서
아버지 자랑을 해보자 하셨다
우리들은
아버지 자랑이 무엇일까 하고
오늘에야 생각해보면서
그러나
탄 캐는 일이 자랑 같아 보이지는 않고
누가 먼저 나서나
몰래 친구들 눈치만 살폈다
그때
영호가 손을 들고 일어났다
술 잡수신 다음 날
일 안 가려 떼쓰시다
어머니께 혼나는 일입니다
교실 안은 갑자기
웃음소리로 넘쳐 흘렀다
장소는 탄광촌. 정확히 말하자면 그곳에 위치한 초등학교의 교실이다. 어느 날, 새 선생님이 오셔서 아버지 자랑을 해보자 말했다. 여기서 잠깐, 부디 이 선생님의 의도를 오해하지 말자. 그는 아이들의 배경과 재력을 알아보려는 것이 아니다. 선생님은 착하디착한 시인 선생님, 아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광부의 아이들이다.
난생처음 아버지 자랑을 해야 하는 아이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대체 우리 아버지는 뭐가 잘났을까. 요새 초등학생들 같으면 남한테 질세라, 사실에 허풍을 보태서 목청껏 떠들 텐데 이 아이들은 주저주저했다. 내 아버지의 잘남이 네 아버지의 잘남을 이겨야 한다는 생각, 아버지 자랑이 곧 내 자랑이 된다는 생각 자체가 아예 없는 아이들이다. 금방 떠올리지 못하는 이 아이들은 너무나도 순수하다.
영호가 내놓은 대답이 특히 엉뚱하고 귀엽다. 숙취에 시달리며 바가지 긁히는 일이 아버지가 잘하시는 일이란다. 이 아이는 얼마나 진지한지, “떼쓰시”는 아버님 자랑에 꼬박꼬박 높임법까지 사용하고 있다.
시의 제목만을 보았을 때는 오해하기 쉽다. 직책 높고 돈 많은 아버지가 있다는 말일까. 대단한 아버지와 귀한 자식의 집안 자랑을 들어야 한다는 말일까. 그런데 읽어 가다 보면 굳었던 마음이 풀리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아버지’와 ‘자랑’. 이 두 단어의 조합에 왜 우리는 지레 움츠러들었던 것일까.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버지 자랑도 있는데 말이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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