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수의 매거진 레터] 높이 올라갈수록 '亡身 조심' (조선/ 160714)
확신에 차서 정답을 빨리 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유형 분들은 대개 똑 부러지게 일을 잘합니다. 자기 능력에 대한 믿음도 강하고요. 그 까닭에 출세도 잘합니다. 그런데 지위가 높아지고 권력을 갖게 되면 반드시 사달을 냅니다. '막말 부장검사' '망언 고위관료'가 그래서 나옵니다. 자기만 잘난 줄 알고 부하나 백성을 '견돈(犬豚)'으로 여깁니다. 재승박덕(才勝薄德)이란 '재주는 뛰어난데 덕이 부족하다'는 말이 아니라, '재주가 뛰어나다고 여기면 반드시 덕이 모자라게 된다'는 명제처럼 들립니다.
개인적으로 주저주저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이런 유형 분들은 지위가 높아져도 스스로 확신하지 않기에 다른 의견을 경청합니다. 문제는 높아질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는 것이지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자기주장을 적극 밀어붙여야 할 때가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독점한 양 여기는 태도와는 다릅니다. 1980년대 후반 대학 다닐 때 운동권 선배들에게서 그런 느낌을 자주 받았습니다. 내가 정의(正義)이니 너희 우매한 인간들은 그저 따르라는. 그런 사람 이제 사양하렵니다. 이 말도 정답을 빨리 내린 것일지 모르겠네요.
영국 극작가 버나드 쇼(1856~1950)는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묘비명에 이렇게 적혀 있답니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백 세 가까이 사는 동안 늘 좌고우면 노심초사했다는 말일까요. 하지만 정답을 서둘러 내리지 않고 복잡한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려는 태도가 작품의 깊이를 더 깊게 했을 터입니다. "이해하기 위해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야말로 토크빌로 하여금 미국 사회에 대한 예리한 학도가 되게 했다"(브루스 커밍스)고 합니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판단 중지(에포케·epoche)'라는 어려운 철학 용어도 별 게 아닙니다. 잘난 척하지 말라는 뜻으로 저는 읽었습니다.
옳다고 확신할 때 한 번 더 의심해야 합니다. 견돈 같은 남의 말도 들어야 망신(亡身)하지 않습니다. "불쌍한 개인성이여, 너는 네가 너를 강력하게 주장할 때, 네가 아니다."(김현 '말들의 풍경') [이한수 주말매거진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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