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izen 칼럼] 新版 '남노당 귀신' 몰아내기
‘사이비 진보’가 이렇듯 판을 치게 된 데는
우리 사회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취약성,
그리고 지식인의 비겁성이 적잖은 몫을 했다.- 류근일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 결정은 민주화 후 우리 사회의 사상적 일탈에 대한 단호한 교정(矯正) 조치였다. 이 방향으로도 서보고 저 방향으로도 서보고 하다가 점차 보다 바른 향배(向背)를 잡아가는 치유의 과정이기도 했다. 통진당 해산은 그 치유 과정의 한 결정적인 국면이었다.
민주화 이전은 안보와 산업화 절대 우위의 시대였기 때문에 ‘진보’에 대한 세련된 국민적 인식도, 학습도 없었다. 그러다가 민주화의 봇물이 터지면서 “좌(左) 쪽으로 달리는 건 무조건 다 좋다”는 풍조가 일었다. 오랜 권위주의 시대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그러나 좌 쪽이라고 해서 다 진보가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다. 자유와 인권은 물론, 시장경제의 일정 부분을 유지하면서 평등을 추구하자는 좌파는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평등을 추구한답시고 자유와 인권은 물론, 시장원리 전체를 송두리째 폐지하는 극좌(極左)는 나쁜 것이다. 그것은 전체주의, 일당독재, 일인 독재, 특정이념의 독재, 수용소 체제, 공포와 폭력의 독재이기 때문이다. 이걸 정말 좋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불행하게도 우리의 경우엔 이런 옥석(玉石)의 구분 없이, 다시 말해 '민주적 좌파(democratic left)'와 '전체주의적 극좌(totalitarian left)'의 구분 없이, 그저 “전체주의라도 좌익이면 다 진보요 좋은 것”이라는 식의 무지와 편향과 독단이 한동안 판을 쳤다. 지금도 그렇다. 유신과 신군부에 반대하면 악마도 천사“라는 투였다. 이래서 우리사회에선 민주적 좌파 대신 전체주의적 극좌, 바로 NL 계열(자주파,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 주사파, 종북주의)이 마치 진보인 양 좌 쪽을 주름잡아 왔다.
이런 유(類)의 좌파세상은 지성의 고갈, 이성의 황폐, 감성의 타락, 미(美)학의 추락, 그것이었다. 양질(良質)의 보수와 진보가 다같이 건재해야만 가능한 자유민주 문명세상을 위해서도 이런 저질(低質) 좌파는 저질 우파 뺨치게 해악(害惡)적이었다. 이게 세계사의 교훈이었고 우리가 겪은 현대사의 경험이었다.
사실이 그러함에도 ‘사이비 진보’가 이렇듯 판을 치게 된 데는 우리 사회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취약성, 그리고 지식인의 비겁성이 적잖은 몫을 했다. 이런 취약한 지식인들이 극좌의 모략, 중상, 네임 콜링(name calling, 욕설), 왕따가 두려워, 그리고 “먹고사는 데 지장이 있을까봐” 논쟁을 회피하고, 꽁무니를 빼고, 침묵하고, 대세에 영합하고 편승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통진당과 그 전신인 민노당을 향해 “저건 있어선 안 될 집단, 그래서 마땅히 해산시켜야 할 집단”이라고 한 사람들은 아주 극소수의 헌신적인 인사들뿐이었다. 그들이 처음 ‘통진당 해산 청원운동’을 시작했을 때 그들의 외침에는 그 어떤 ‘보수 미디어’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극우’라는 가당치도 않은 낙인의 폭력을 그들에게 휘두르지는 않았던지? 본란(本欄) 역시 딱히 내세울 것은 없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이석기 사건이 터지고 박근혜 정부의 법무부가 통진당 해산심판을 헌재에 청구하면서부터 마치 극좌세력의 존재와 위험성을 비로소 처음 알았다는 듯, 이에 대해 한 줄 두 줄, 사태에 밀려 쓰기 시작했다. 이게 우리 사회 지식인 계(界)의 모습이다. 그들 역시 주사파와 같은 시기에 대학을 다닌 386~486 세대라 동기생들의 극좌적인 움직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터인데도 그동안은 한 번도 "너희들은 종북이다"라고 지적하거나 논쟁하거나 공격한 적이 없었다. 그저 막연히 "진보진영이 어쨌다"라는 식으로 모호하게만 불러주고 감춰주었을 뿐이다. 그러니 분명히 말해야 한다. 그들이 과연 '진보'인가?
486 지식인들은 그래서 자신들의 의식의 편력에 대해 이쯤 해서 결론을 내려야 한다. “우리는 권위주의를 악마로 보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극좌 전체주의를 ‘적(敵)의 적은 친구’로 껴안았다. 그때는 그랬다고 치고, 이제 와서 볼 때 그것은 ‘또다른 악마’와 계약한 중대한 오류(誤謬)였다”고
이런 고백의 의식(儀式)을 치러야 ‘지식인의 정직성’을 기하는 것이다. 어물쩍 넘어가선 안 된다. 이런 세대적, 개인적 고백을 거침이 없이 그냥 은근슬쩍 넘어가면 통진당이 아무리 해산된다 해도 극좌 전체주의에 대한 486 지식인들의 터무니없는 ‘봐주기’ 체질은 여전히 남을 것이다.
‘공동 정책합의’를 하며 얼싸둥둥, 좋아 죽겠다며 서로 부둥켜안고 뽀뽀를 하던(과장표현) ‘한명숙 민주당’의 잔재는 헌재 결정 후에도 여전히 ‘통진당 해산 반대’라고 말한다. 노동, 매스콤, 문화, 역사담론, 공교육 현장에도 ‘통진당 유사 증후군’이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드리고 있다. 우리 이념지형과 정치지형에서 ‘애국적 반대당(loyal opposition)’의 스펙트럼(spectrum, 分光)은 아예 소멸했다는 뜻인가?
새민련은 그래서 분명한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 통진당은 아직도 당신들의 친구인가? 아니라고? 그럼 통진당 해산에 대해 왜 그렇게 알쏭달쏭한 표현으로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소리를 하고 있는가? 왜 그렇게 도무지 "빵!" 하고 벗어나질 못하는가?
이제 바라는 것은 좌파 세상을 극좌가 아닌 ‘애국적 민주좌파’가 휘어잡는 것이다. 그런 인사들과 그룹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발족한 ‘사회민주주의 포럼(이사장 박범진)’이 그 한 사례다. 이런 그룹이 지식인 사회의 호감 반응을 거쳐 시민적 호감까지 받게 된다면 좌파 계(界)에 대한 주사파의 일방적 장악력은 한결 약해질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대명천지에 국민소득 3만 달러의 대한민국을 여전히 "식민지 종속국…" 운운하는 ‘신판 남노당 ' 귀신이 출몰한다는 것은, 그래서 대학깨나 다녔다는 친구들 사이에도 그 좀비가 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선진국 정상회담을 주최했노라고 뻐기는 코리언들의 수치스러운 스캔들이다. 헌재는 뒤늦게나마 이 스캔들을 씻으려 했다. 한국정치사상 획기적인 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그 스캔들을 한동안 방치했던 우리사회의 반(反)지성 풍토는 그대로 남아 있다. 이걸 씻는 일은 우리 세대 각자의 몫이다.
류근일 201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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