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功過 나온 5·16, 재탕 논쟁 '독재자 딸은 안 된다'는 전략 탓
유신은 실패한 실험이었으나 5·16, 산업화·근대화 성공 낳아
그때 흘린 피땀이 한국인 긍지… 끝없는 역사 단죄는 파열의 원인
- 류근일 언론인
5년 만에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벼르는 쪽으로서는 "모처럼 거머쥔 정권을 이명박에게 빼앗긴 것만도 절치부심할 노릇인데 이번에도 또? 그것도 박정희의 딸에게?"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짜낸 것이 "5·16은 나쁜 것, 박정희는 독재자,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 그래서 박근혜는 안 된다"는 프레임이었을 것이다. 이래서 현재와 미래를 다룰 법한 여·야의 선거전략이 때아닌 '과거로의 시간여행'으로 달아오르고 있다. 그렇다면 골백번도 더 했을 이 '진부한' 옛이야기를 한 번쯤은 또 짚고 넘어가야 하게 되었다.
그러면 5·16과 유신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체제 지킴이인 중앙정보부장이 체제 총수인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참으로 엉망진창의 결말 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유신은 자폭(自爆)으로 끝난, 따라서 실패한 실험이었다. 역사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다고 하지만, 그날 밤 '궁정동 안가(安家)'로 축약된 유신체제에는 "유신 해서 좋은 게 뭐였느냐?"고 묻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다.
반면에 5·16 후의 산업화와 근대화는 어땠나? '5·16 그날'은 물론 군사평의회(junta)의 쿠데타였다. 그러나 3공화국 이후의 산업화와 근대화는 한국의 추상같은 야당까지도 부인 못 할, 그리고 전 세계가 놀란 성공적이고 발전적인 사회변동이었다. 명칭이야 뭐라고 붙이든, 5·16은 이점에서 중남미나 아프리카의 흔해 빠진 '쿠데타일 뿐인 쿠데타들'과는 사후적인 파장의 차원에서 같은 것으로 칠 수 없다.
물론 "박정희 아니라 누구라도 경제발전 할 수 있었다. 노동자·농민의 인권을 곤곤하게 한 대가였다"는 반론(反論)이 있다. 그러나 '그때 그 사람의 그 몫'을 빼고서 한 시대의 성적을 매길 수는 없다. 그리고 그때의 곤곤함이 끝없는 '고난의 행군'으로 이어지지 않고 한 세대 만에 '민주화까지 된 G20 국가'로 뻗은 오늘의 자화상 속에서, 그때의 한국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들이 흘렸던 피와 땀과 눈물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자긍(自矜)할 수 있다. 이게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이 그때 어느 쪽에 섰었건 할 수 있고, 할 만하고, 해야 할 '과거사 정리' 아닐까?
실제로도 1960~70년대를 포함하는 지난 시대의 꼬임들은 1990년대 이후 여러 번의 정권교체와 '역사 바로세우기' '과거사 정리' '진상규명' '사법적 재심(再審)' '민주화 보상심의'들을 거치면서 그야말로 '풀린 매듭'으로서 역사 속에 안장(安葬)되는가 싶었다. 그런데 요즘 돌아가는 "5·16 다시 보자"가 말해주듯, 그게 아직도 그렇지가 않은 것 같다.
여기엔 "(5·16 때) 아버지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어법(語法)이 빌미를 잡힌 구석도 없진 않다. 박근혜 후보가 만약 "그 시대의 잘잘못에 대해선 이미 객관적인 정리가 끝나지 않았나요?"라는 정도로 넘겼더라면 한결 무난했을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가 설령 그렇게 말했다 해도 싸움을 걸려는 측은 그러면 또 그런대로 계속 '나쁜 역사인식'을 단죄(斷罪)하자는 판을 들고 나왔을 것이다.
이런 끝없이 되풀이되는 역사 단죄는 "아무리 많이 해도 시원치 않다"는 쪽의 '그 나름의 이유'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현재와 미래를 수습할 길 없는 해체와 파열로 몰아갈 수 있다. '바뀌네' 쪽의 진정성과 충분성은 물론 담보돼야 한다. 그러나 어느 지점부터는 그 반대쪽의 '바뀌네'도 필요하다. 그래야 피차 자유로워질 수 있고 함께 해방될 수 있다.
대한민국 현대사엔 빛도 있었고 그림자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성공한 역사, 빛을 향한 역사였다. 이에 대한 애정과 긍지를 이젠 공유할 만도 하지 않은가? "대한민국은 태어나선 안 될 나라, 식민지 종속국"이라고 하는 극단적 원죄론(原罪論)이 아닌 다음에는 현대사의 화해가 안 돼야 할 이유가 없다. 대통령 선거라 할지라도 정치가 그것을 깨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