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논단] 통일 논의 앞서 안보 포퓰리즘 치유를 / 김인규 한림대 교수 (조선 101012)
'우리의 소원'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통일'이 떠오른다. 하지만 통일을 위해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현실'은 험난하기 그지없다. 북한의 김정일·김정은은
핵무장을 강화하며 여전히 적화통일의 야욕을 불태우고 있다. 현실이 이런데
도 통일부는 한가하게 이명박 대통령이 제안한 '통일세(稅)'를 뒷받침하기
위해 '통일 후 미래상'이라는 주제로 40억원짜리 대규모 연구용역을 발주할
예정이다.
그러나 틀렸다. 통일 후 미래나 논하기에는 천안함 폭침(爆沈)으로 드러난
우리의 안보 현실이 너무나 엄혹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의 구호인 '싸우면서 건설하자'를 오늘에 맞게 '지키면서 성장하자'로 되살려
야 한다. 통일세 재원이 있다면 그것으로 안보기반부터 튼튼히 다지면서 우리 경제의 파이를 키워나가야 한다. 그래야 미래의 세원(稅源)이 커지고 따라서 통일 비용 마련도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을 위한 이 대통령의 노력은 그런대로 합격점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안보에 관한 한 그는 여전히 낙제점을 맴돌고 있다. 천안함 사태 한 달여 뒤에 그는 충남 현충사를 찾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에 참배했다. 그는 "죽으려고 나아가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는 충무공의 가르침을 되새기기 위해 방명록에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라고 적으며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지난 9월 초 안보전문가로 구성된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는 육군 기준 18개월로 단축이 예정된 현역병 복무기간을 24개월로 환원할 것을 이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이 건의에 대해 그는 국민정서를 이유로 들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문제"라고 말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각오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현역병 복무기간 단축을 포함한 안보 포퓰리즘(인기 영합주의)이야말로 '노무현 포퓰리즘' 가운데 가장 무서운 포퓰리즘이다. 세종시 포퓰리즘이야 행정부처 이원화에 따른 비용 증가 정도로 끝날 문제지만, 안보 포퓰리즘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약 천안함 사태가 터지지 않았다면 이 대통령은 안보 포퓰리즘 치유에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천안함 폭침 이전인 지난 2월 한나라당 유승민 의원이 복무기간을 22개월로 재조정하는 병역법 개정안을 발의했을 때 이 대통령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그 개정안은 폐기됐다.
내가 병역을 기피하더라도 나와 내 가족이 누리는 국방의 혜택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가능하면 병역의 의무는 피하되 그 혜택은 누리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경제학에서는 이것을 '무임승차(free-riding)' 인센티브라 부른다. 이런 인센티브를 억누르고 제대로 된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국가가 강제력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다. 이때 국가 강제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병역 의무의 공정성과 더불어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도덕적 의무)가 필수적이다.
기원전 218년부터 16년간 지속된 '한니발 전쟁'은 신흥 로마 최대의 위기였다. 로마가 이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대통령에 해당하는 집정관(執政官)이 10명 이상 전사하는 등 지도층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시력이 나빠 병역면제에 해당됐지만 시력표를 외워 입대한 뒤 제1차대전에 참전해 싸웠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언급하기조차 민망하다. 우리의 최고 안보기구인 국가안전보장회의의 멤버는 의장인 대통령을 포함해 모두 8명이다. 그 8명 중 국방장관을 제외한 7명 가운데 3명이 병역면제자다. 이 대통령의 안보정책에 대해 많은 국민이 냉소적인 이유는 복무기간이 길어서가 아니라 이렇듯 지도층의 병역면제 비율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북한은 김정은으로의 권력승계 과정에서 나타날 내부 불만을 해소하고 결속을 다지기 위해 대남 도발을 감행할지도 모른다. 이런 도발을 사전에 예방하려면 안보 포퓰리즘을 바로잡고 안보에 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대통령부터 병역면제자를 고위 공직에 임명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병역의무의 공정성을 제도적으로 재정립해야 한다. 통일 후 미래에 대한 논의는 그 뒤에 해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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