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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설지선-가황자료실/남인수★가요일생

[스크랩] "친일잔재청산을 위한 진주시민운동"의 2월 게재글에 대한 `덧글`/어수정

설지선 2008. 3. 14. 09:44

"친일잔재청산을 위한 진주시민운동"의 2월 게재글에 대한 '덧글'


늦었으나마, 한 마디 하지.
일제 강점 발악의 시기에 '의지할 곳 없는 대중(민중)'을 버리지 않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부른 노래 몇몇을 가지고(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그 이유는 앞뒤 문맥에 나타나 있으니까) '친일파'라니? '민족문제연구소'라는 단체는 제대로 검증된 곳인가? 절박한 당시의 전후 실정을 세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친일'의 개념마저 호도, 오도하는 이 단체부터 제대로 검증될 때까지 '활동 정지 가처분 신청'을 당해야 한다.

 

진주의 얼치기 "시민단체"는 속 좀 차리길---. "1948년 백범 김구 선생의 지시로 만들어진 친일파 263 명"이라 함은 '정경문제연구소'가 펴 낸 '친일파 군상(群像)'이란 책을 말하는 것임은 물론이겠지만, 멍청이들같이 이 책의 서문에서 밝힌 내용을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은 모양이지? 잘못된 것들도 있을 수 있으니, 다시 신중을 기해 규명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글 말이다. '민족문제연구소'나 일부 시민단체가 뭘 제대로 다 알아서 하고 있는가? 내가 보기에는, 좋게 말해 삼척동자 수준이요, 나쁘게 말하면(이게 제대로 말하는 것), 무지렁이 수준에 불과하다.


남인수-백년설 등은 무대에 서서 늘 민중과 더불어 울고 웃으며 그들과 고락을 함께한 '민족가수'다. 무대에서 그런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다. 당시의 민중은 이 시기에 벌어지는 일제(왜정)의 단말마의 발악을 다 알고 있었고, 피부로 다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중 연예인들이 겪는 고통이 자신들의 것임을 무언으로 공감하고 있었다. 그런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도 물론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이른바 '민족문제연구소'나 비슷한 성향의 시민 단체들만 모르지.


마지막으로, 노래의 대부분을 작사한 월북 작가 조명암(본명 조영출)도 북한에서 "친일파"라고 하지 않았다. 뇌수가 아직도 남아 있거든 생각이나 좀 해 보라. 당시의 민중(대중) 모두, 창씨개명-징용-"정신대"에 끌려간 민중이 모조리 "친일파"인가? '친일파'의 바른 개념은 일제에 빌붙어[부일(附日)하여] 부귀공명을 누린 자들과 그 하수인들이다. 알겠는가?


 *자료; 남인수팬클럽(가요114)

출처 : 설지선의 옛노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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