딛고 - 유병록(1982∼) 선한 이여 나에게 바닥을 딛고 일어서라 말하지 마세요 어떻게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 네가 활보하다가 잠들던 땅을, 나를 기다리던 땅을 두 팔에 힘을 잔뜩 주고서 구부러진 무릎을 펼쳐서 어떻게 너를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 여기는 이미 깊은 수렁인데 선한 이여 손 내밀어 나를 부축하지 마세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여기에 너의 웃음과 울음을 두고서 나를 부르던 목소리와 너의 온기를 두고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모두 묻어두고서 떠날 수 있을까 여기는 이미 나에게도 무덤인데 16세기의 허난설헌은 두 아이를 잃고 나서 ‘곡자(哭子)’라는 시를 썼다. 어린 자식을 잃은 심정이 어찌나 서럽던지 시인은 피눈물로 울음소리 삼킨다고 표현했다. 그 후로부터 몇백 년이 지났다. 지금은 허난설헌..